쿠바 여행기 5일
2023.11.30.목요일
어제 숙소에 채크인하면서 조식(5달러)을 신청했었다. 이곳 숙소의 조식에 대한 평판이 그런대로 괜찮아서 시켜본 것이다. 팬케이크, 빵, 과일, 커피와 쥬스, 오믈렛까지 나와서 구성면에서는 괜찮은 조식이었다. 하지만 두 번 먹고 싶지는 않다. 팬케이크와 오믈렛에서 다소 실망했다. 그냥 밖에 나가서 식당을 찾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과 가격대비 가성비가 좋다는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다. 식당에서 조식을 시켰다면 가격은 두 배 혹은 세 배였을 것이다.
느긋하게 밖으로 나와서 본격적인 시엔푸에고스 탐험을 시작했다. 시엔푸에고스는 쿠바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여기서 바라보는 바다가 카리브 해다. 우리가 보통 쿠바하면 카리브 해를 떠올리는데 엄밀히 말하면 쿠바의 남쪽 바다가 카리브 해에 속한다. 반면 아바나가 위치한 북쪽바다는 멕시코 만에 속한다. 하지만 뭐, 지리학자가 될 것도 아닌데 너무 따지고 들지 말자.
숙소에서 50미터 정도 걸어나가니까 유명한 시엔푸에고스 역사 지구다. 숙소 위치를 참 잘 잡는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 후후. 중앙에 호세 마르티 공원이 있고 주변에 성당, 시청, 박물관, 예술회관 등이 있다. 가히 시엔푸에고스 여행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공원 중앙에 호세 마르티 동상이 있다. 지난번 혁명 광장에서 보았던 그 호세 마르티다. 그는 19세기 쿠바의 시인이자 정치가다. 쿠바의 국민 영웅이라고 하는데 아바나의 공항도 호세 마르티 공항이고 지폐에도 그의 얼굴이 있다. 체 게바라가 칼로 혁명을 일으켰다면 호세 마르티는 펜으로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여러 정보를 찾아보니까 그에 대한 쿠바 국민의 사랑이 왜 변함없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아메리카 대륙의 평화를 이야기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말과 함께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사람이다. 멋지다.
호세 마르티 공원 옆에는 이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퍼데스트리언 스트리트가 있다. 여기는 이 동네의 핫 플레이스, 쇼핑 거리다. 차량이 통행하지 않는 보행자 거리이고 곳곳에 음식점, 옷가게 등이 즐비하다.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작은 마켓을 발견했다. 벼룩시장 같은 곳이다. 이런저런 수제 기념품들을 팔고 있는데 자잘한 소품들을 구경하기 좋다. 한쪽에는 수제 구두 가게도 있는데 즉석에서 구두를 수선해주기도 해서 신기했다.
호세 마르티 공원을 지나 쇼핑 거리를 지나면 큰 도로가 나온다. 거기에는 멋드러진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들 찍고 있다. 쿠바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가수인 베니모어 동상이란다. 나는 잘 모르는 분인데 재즈 뮤지션으로 쿠바의 국민가수란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조용필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여기가 베니모어의 고향이란다. 내가 열심히 동상의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관광객 꼬마가 나타나서 폼을 잡는다. 타이밍이 참 절묘하다. 하.하.하.
이 근처에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이럴수가! 가게가 공사중이다. 윽. 아바나에서는 박물관이 공사 중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공사 중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공사 중 푯말을 많이 보게 될 듯하다.
그나저나 햇살이 너무 뜨겁다. 적도 근처라 그런지 작열하는 태양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숙소로 대피할까 하다가 어차피 점심 먹고 숙소에 들어갈 일이 있으므로 지금은 좀더 돌아다니기로 했다. 작열하는 태양을 뚫고 바닷가 쪽의 공원으로 향했다. 안경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고 그 근처에는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데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서 노닥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동양 관광객인 나를 신기하게 보았고 나는 쿠바의 학생들을 신기하게 보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끝난 것인지 물었다. 물론 짧은 영어로. 학생들 중에서 2명 정도가 영어를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한다. 영어를 적당히 못하는 사람들끼리는 오히려 대화하기 편하다. 후후. 그들은 아침 5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을 듣는단다. 아마도 해가 너무 뜨거워서 빨리 수업을 시작하고 빨리 끝내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의 학생들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듣고 보충수업을 하면 더 늦게 끝난다고 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술렁술렁한다. 장난기 가득한 학생이 뭐라뭐라 하자 통역을 맡은 학생이 웃으면서 그러면 한국의 학교에서는 점심을 주냐고 묻는다. 당연히 점심을 준다고 했더니 또 자기들끼리 난리다. 자기네는 점심을 주지 않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학교에 오래 있을 수가 없단다. 하.하. 그렇겠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시험, 장래희망 등에 대해 소소한 수다를 떨었다. 어디나 학생들은 비슷하다. 수학이나 과학은 다들 별로 안좋아한단다.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이 한 명 있는데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이란다. 지목받은 학생은 어깨를 으쓱하며 모범생 티를 냈다. 학생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마침 통역을 맡은 학생이 인스타그램이 있다고 해서 서로 친구맺기도 했다. 우와! 쿠바의 학생과 인스타 친구가 되었다. 오늘 하루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날이다.
한바탕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은 집으로 향했고 나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전망대로 향했다. 보통 여기는 코코나 택시를 이용해서 간다는데 나는 산책도 할겸해서 걸어갔다. 약 2킬로 정도의 거리인데 평소 한국에서 걷던 거리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만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좀 고생을 했다. 가는 길에 그늘이 너무 없다. 야자수가 쭈욱 심어져 있으나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는 아니다. 아!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립다.
너무 더워서 햇살을 피해 바닷가의 카페에서 쥬스 한잔을 시키고 한숨을 돌렸다. 짧은 휴식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무슨 리조트 같은 건물이 있고 그 너머로 요트 선착장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다. 여기서 근처를 요트로 돌아보는 여행 상품이 있다고 한다. 요트 선착장을 지나자 작은 해변이 나오는데 경치나 너무 멋지다. 매점과 카페도 있고 화장실도 있는 작은 해수욕장이다. 수영복을 가져 왔다면 한번 뛰어들만하겠다.
드디어 시엔푸에고스 남쪽의 끝에 있는 공원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원 입구에서 어떤 사람이 입장료랍시고 100페소를 내란다. 입구에 매표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입장료를 받았다는 영수증이나 입장권을 주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봐도 입장료를 받을만한 곳이 아닌데 내란다. 중국이나 인도에서 하도 이런 일들을 많이 겪어서 뭐 새삼스럽지도 않다. 관광객 대상으로 한 사기나 바가지가 이곳에도 있구만.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서 그냥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니까 공원 일부가 공사 중이다. 아, 이번 여행은 공사와 함께 하는구나. 보아하니까 카페와 식당을 리모델링하는 것 같다. 공사하는 곳을 지나 공원의 가장 끝에 있는 정자를 향했다. 여기가 이 공원의 하이라이트다. 아담한 정자인데 여기서 보는 경치가 끝내준다고 해서 와봤다. 그런데 솔직히 그냥 그렇다. 만의 끝이라 3면으로 탁 트인 전망이 좋기는 하다. 하지만 이미 걸어오면서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계속 바라보면서 온 터라 그다지 감동적이진 않다. 그래도 하늘과 바다, 정자가 어우러진 모습은 멋지다. 참, 여기서는 일출도 볼 수 있고 일몰도 볼 수 있단다. 위치상 그럴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에 여기까지 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사이에 서양 관광객 커플이 오더니 훌러덩 옷을 벗어서 바위에 놓고 바다에서 수영을 즐긴다. 그래. 한참 더운데 걸어왔으니까 바다에 들어가면 좋긴 하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옷 안쪽에 수영복을 입고 올 걸 그랬다. 큰 수건이라도 들고 왔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냥 나는 발만 좀 담그고 나왔다. 그늘에서 발을 담그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천국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씻고 쉬다가 나왔다. 일몰을 보려고 점 찍어둔 장소가 있다.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라서 구글맵을 보면서 찾아 갔는데 헤맸다. 길을 살짝 잘못 들어섰는데 하필이면 공동묘지로 이어져 있는 방향으로 갔다. 이 공동묘지도 볼거리로 소개되어 있어서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그래서 들어가 보려는데 입구에서 할머니 한 사람이 입장료(500페소)를 내라고 한다. 여기도 입장료를 받을만한 곳은 아니다. 게다가 가격이 너무 심하다. 아까 그 공원은 100페소라서 내가 참았지만 500페소는 너무하군. 내가 포기하고 그냥 가려고 하니까 할머니는 그러면 그냥 들어오란다. 이건 뭐냐? 딱 보니까 할머니는 공원 관리인이고 여기는 입장료를 받는 곳이 아닌데 외국인이 오니까 할머니가 용돈 챙기려고 뻥친 거 같다. 아까 그 공원도 마찬가지였겠지.
공동묘지에 들어서니 아름다운 조각들이 많이 있어서 묘지라기 보다는 조각 전시실같다. 그런데 할머니는 따라다니면서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열심히 설명을 한다. 나름 무언가 돌아보는 동선이 있나보다 이리저리 안내를 한다. 그리고 몇 가지 아름다운 조각들이 있는 묘에는 사연이 있나보다. 말을 알아들으면 좋을텐데 아쉽다. 나오면서 할머니에게 100페소를 드렸다. 내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뭔가 열심히 설명했으니까. 그리고 할머니가 안내하지 않았으면 반대편 길도 없는 곳으로 갈 뻔했다.
묘지를 나와서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면 내가 가려던 장소가 나온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부두인데 멀리 보이는 항구까지 철도로 연결되어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철길이 끊겨있다. 부서진 철길과 푸른 바다가 어색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한적하다. 이 동네 주민들이 가족 단위로 와서 낚시를 하고 있다. 낚시대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낚시줄만 내려뜨려서 물고기를 낚는다. 어떤 주민은 그물을 가지고 와서 아슬아슬하게 철골 구조물 아래로 내려간다.
낚시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려니까 해가 서서히 바다 아래로 가라 앉는다. 예상대로 일몰은 너무 근사했다. 저 멀리 바다 끝 어스름한 곳에 섬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뒤로 해가 넘어간다. 역시 일몰은 쓸쓸하게 아름답다. 붉게 물든 노을과 구름, 바다를 보면서 다시 한번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을 했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장엄하고 아름다울까?
이곳으로 일몰을 보러 오길 잘 한 것 같다. 끊긴 철도와 바다의 모습도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고 가족단위로 와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한참동안 일몰과 끊어진 철도,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지만 묘하게 어울린다. 유명 관광지 구경보다 여기서 머문 시간이 나는 훨씬 더 좋았다.
저녁은 내가 그동안 벼르고 별렀던 랑고스타(작은 랍스타)를 먹으러 쇼핑거리로 나섰다. 낮에 오가면서 눈여겨 보았던 식당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서 들어갔다. 그런데 관광객 대상으로 한 바가지 요금이 있다는 여행기를 읽었던 터라 당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건만 역시 나도 피해가지는 못했다. 제대로 눈탱이를 맞았다. 2,500페소라는 메뉴판을 보고 시켜서 먹었는데 계산할 때는 5,000페소라고 뻥을 친다. 메뉴판과 다르다고 항의했지만 뭐 그건 예전 가격이다, 환율이 높아서 페소로 계산하면 그렇다, 이건 세트메뉴 가격이다 등등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한참 실랑이를 했지만 소용이 없다. 이럴 때는 왜 경찰도 안보이는거야?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서 별 수 없이 두 배의 가격을 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방심했다. 인도나 중국 여행을 하면서 하도 당해서 보통은 식당에서 주문할 때 메뉴판의 사진을 보란듯이 찍고 나서 가격을 두세 번 확인했었다. 사진을 찍거나 촬영을 하면 대부분 바가지를 함부로 못 씌운다. 그런데 쿠바에 와서 지금까지 식당에서 이렇게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없길래 안심하고 있었는데 보기좋게 당했다.
하루의 마무리를 안좋게 했다. 역시 다 좋을 수는 없는거구나. 아니다. 오늘은 쿠바의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으므로 그걸로 되었다. 돈은 그냥 잃어버린 셈치면 그만인 것이다. 해맑게 웃는 쿠바의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행운의 날이다. 매일매일 새롭고 재밌는 경험들을 하는구나.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