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날개 : 순우리말이란 존재하는가
오래전 tvN <신서유기>에서 훈민정음 놀이를 하는 것을 깔깔대며 본 적이 있다. 탁구 등 게임을 하다 외국어, 외래어를 쓰면 벌칙을 받거나 0점으로 돌아가는데 출연자들은 알면서도 습관 때문에 ‘우리 팀 파이팅!’ 같은 실수를 연발한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외래어, 특히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스마트폰, 게임, 커피, 팀, 인터넷, 콘텐츠, 아이디어, OK, 비즈니스, 모델, 비전, 미션, 컨셉(콘셉트), 커리어, 데이터, 시스템, 프로그램, 드라이브 스루, 클라이언트 등등
우리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영어를 쓰고 있는가!
하지만 이것이 과연 반성해야 하는 대목일까?
이 훈민정음 놀이에는 한 가지 숨겨진 전제가 있다. 한자로 된 단어는 우리말이라 치는 것이다. 나랏말싸미 중국에 다르지만 한자는 우리말이란다. 그 단어들은 아주 오래전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이미 토착화되었으니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한자 단어들을 우리말이라 인정해도 될까? 이 단어들을 한글이 아닌 한자로 표기하면 과연 우리 주변 사람들 중 몇이나 읽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놀랍게도 1990년대 중반까지 신문에는 한자가 섞여 있었다. 심지어 한글을 옆에 같이 써주지도 않았다. 그때는 신문을 읽기 위해서는 한자를 알아야만 했다.
그 당시 신문들은 이 단어들이 원래 외래어라는 것을 오히려 쉽게 인지시켜주었다. 비록 지금은 한자로 표기하지 않게 되어 이 사실을 깨닫기가 조금 어려워졌지만, 이미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들이 우리말과 분리할 수 없는 지경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이미 이 글에도 ‘영어, 외국어, 습관, 실수, 일상, 단어, 분리, 사실, 명백’ 등 무수한 한자 단어가 녹아 있다.
그럼 이렇게 한자를 많이 쓰고 있는 것도 반성해야 하는 대목일까?
중요한 것은 이미 한자든 영어든 외래어를 못 쓰게 한다면 일상적인 언어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요즘 ‘트렌드’상 영어로 된 단어들을 쓸 일이 많이 생기는데, 그래서 간혹 우리말을 소중히 지켜야 하는 사람이 그렇게 영어를 써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말이란 무엇인가, 순우리말이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역으로 던지게 된다.
마치 순수혈통을 찾듯 순우리말을 찾겠다고 한다면 그런 ‘말’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권력관계란 단순히 물리적, 군사적 힘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력관계를 의미한다.
가령 컴퓨터(computer)와 인터넷(internet)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쪽에서 그 언어를 유통하기 시작하면, 일일이 대응하는 언어를 새롭게 창작하여 ‘셈틀’, ‘누리’ 등등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그렇게 바꾼 우리말을 대중들에게 유포하여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기술적, 문화적 우위의 나라에서 열위의 나라로 언어가 유입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말’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외부로부터 유입된 언어와 결합해 왔다.
(1) 한자의 유입
현재 우리의 한자 독음 방식은 중국 당나라 시대 발음이라고 하는데, 아마 그맘때쯤 한반도에는 중국의 한자가 선진문물과 함께 들어왔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당나라 언어 없이는 언어생활을 못하는 지경이 된 셈이다.
(2) 일본어의 유입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가 유입되었다. 굴욕적인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그 당시 일본어의 잔재를 많이 지워냈으나 여전히 그 당시 유입된 전문분야의 업계 용어에서는 일본어의 잔재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일본어를 지워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전국민적인 노력과 분노가 굉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중들이 사용하던 언어를 의식적으로 지운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3) 영어의 유입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시대와 냉전 시대를 거치며 영어가 침투했다.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미국 기업과 미국 플랫폼이 세계에서 승승장구하고, 한국에서도 영어 교육에 대한 전국민적 열정과 동경에 힘입어 이제는 일상어와 노래 가사에서도 영어와 한국말이 거의 한몸처럼 붙어버렸다.
혹자는 우월한 나라의 언어를 쓰려는 경향을 사대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맞다. 같은 말도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일제시대에는 일본어로, 지금은 영어로 하면 소위 ‘있어 보이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후광효과를 누리기 위해 사람들이 권력 우위의 언어를 쓰려고 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를 사대주의라 부른다면 사대주의가 맞다.
그래서 그게 잘못되었으니 순우리말을 찾아 부흥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개개인이 의식적으로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는 세계의 권력관계의 순정한 반영이다. 일본어를 청산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권력관계가 뒤집힌 이후에야 가능했다. 존재하는 권력관계를 언어로 먼저 뒤집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단지 권력관계가 뒤집힌 이후에야 언어를 뒤집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 기술과 문화의 세계적 영향력이 커지면 우리말의 영향력도 그에 따라 커질 것이라 보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지구에서 꼭 우리나라가 권력 우위를 점해 다른 언어를 이겨야만 할까? 인터넷으로 전 지구의 언어가 서로 섞고 섞이는 21세기에조차 그래야만 하는가? 인류가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고 소통하는 문화를 지향할 수는 없을까?
많은 국문과 선후배들의 예상되는 반발을 무릅쓰고 주장하자면, 나는 한국어와 다른 언어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결합하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동하기를 꿈꾼다. 다만 권력관계에 따라 부당하게 한쪽이 다른 한쪽에 흡수합병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의 생각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습니다. 찾은 답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행위조차 의심합니다. 질문과 의심, 호기심과 자유로운 생각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날게 해 줄 거라 믿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