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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닝리 Apr 06. 2022

누구의 성을 물려줘야 할까?

우리가 영원하다 믿는 것들 : 성(姓)


성(姓, family name)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李)씨다. 흔하디 흔한 이씨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로 꼽히는 ‘김이박' 중 하나다.

간혹 '김이박은 하나다!’라는 주장을 농담 삼아 할 때가 있는데 이게 완전히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6세기까지 한국에는 성씨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황산벌의 계백, 맞서 싸운 관창은 각각 계씨와 관씨가 아니라 성이 아예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자식 성씨를 만든 건 7세기 이후이고 그나마 성씨가 어느 정도 보편화된 건 고려시대 이후라 한다. 태조 왕건이 호족들을 통합하고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들기 위해 본관과 성씨를 지정해준 것이 계기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시대인 17세기까지도 국민의 절반은 성씨가 없었다. 1909년이 되어서야 일제의 민적법이 생기면서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성씨를 갖게 된다. 족보의 90%는 가짜다라는 말도 허튼 소리는 아닌 것이다.


이때 사람들이 자기가 선호하는 성을 고르다 보니 ‘김이박’의 트라이앵글이 탄생한 것이다.

성이 없던 사람들이 성을 고를 수 있게 된다면 무슨 성을 가지고 싶을까? 당연히 역사 속에서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왕족의 성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라왕조 김씨, 조선왕조 이씨, 그리고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박씨가 한국 성씨의 대세로 떠오른다. 김이박은 결국 뿌리가 하나다.


그러니까 결국 7세기 중국 문화의 잔재인 한자식 성씨를 20세기 일제의 민적법으로 유행처럼 받아들인 결과가 바로 오늘날 한국의 성씨가 된 것이다. 그걸 두고 가문이네 족보네 하고 있는 현실이야말로 역사적 코미디 아닌가?




성과 핏줄은 아무 상관이 없다


성씨는 생물학적인 ‘핏줄’, '혈통'의 차원에서도 아무런 근거가 없다.


대부분의 문화권에는 ‘성’이라는 게 존재한다. 문화권에 따라 이름 앞에 쓰기도 하고 이름 뒤에 쓰기도 한다. 많은 곳에서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 변경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부계주의 문화권의 믿음과 달리 실제로 생명체 탄생과 유전의 차원에서 보면 남성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될 때 정자의 미토콘드리아는 사라지고 난자의 미토콘드리아만 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명체의 핵심 역할을 하는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로만 유전된다. 이 때문에 실제로 호모사피엔스, 네안데르탈 같은 인류의 기원을 생물학적으로 추적할 때는 모계로만 추적 가능하다고 한다. 생물학적인 핏줄과 혈통을 따지려면 오히려 모계 성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즉, 애초에 성씨라는 게 생물학적 실체가 없이 인위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부계주의는 혈통보다는 오히려 '가문'을 의미하는 사회학적 차원의 개념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성의 사회학적인 가치도 명백히 소실되고 있다. 여전히 한국의 어딘가에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등 '성'이나 '본관'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무리가 존재하긴 하겠지만, 사실상 그런 사고방식은 사회적으로도 자연스러운 사멸의 길을 가고 있다.


성이나 본관이 의미가 있는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귀족이나 양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혈연주의로 같은 성씨인 사람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성이라는 것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나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더이상 그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성이란 실용적 가치가 없어진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다른 방식의 성을 사용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는 나라들도 늘어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엄마 성씨를 쓰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고 한때 양성 쓰기가 유행처럼 뜨기도 했지만 양성을 쓰든 엄마 성을 쓰든 어차피 부계 성을 따와서 쓰는 것이라 근본적인 대안이라기보다는 상징적 표현 방식에 가깝다. 물론 몇 대를 내려가서 부계와 모계가 섞이고 섞이면 좀 더 성씨의 개념을 뒤흔드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또다른 혈연주의를 만들려는 게 아니라면, 굳이 껍데기에 불과한 성씨에 애써 다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럼 이제 제목에 답해 보자.

누구의 성을 물려줘야 할까?


“누구의 성도 물려줄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이 나의 대답이다.

그저 아이에게 행복하게 자라라는 바람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 이름 또한 아이가 자라서 바꾸고 싶다면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아이에겐 아이의 시대가 있고 아이의 삶이 있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가치관과 제도에 따라 성을 붙였듯이, 성이란 아이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제도에 맞게 자신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 아빠 성이든 엄마 성이든 ‘성’을 물려준다는 규칙 자체가 없어지면 좋겠다. 계백과 관창도 성 없이 한 시대를 잘만 살아냈다.


인간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가지는 세상을 꿈꾼다.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풍성하고 자유로운 선택지가 생기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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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각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습니다. 찾은 답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행위조차 의심합니다. 질문과 의심, 호기심과 자유로운 생각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날게 해 줄 거라 믿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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