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예찬
오래전 인류는 삶의 중심에 신을 놓았고, 그다음에는 국가와 민족을 놓았다.
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 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 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형태를 바꿔가며 이런 주장을 계속해서 펼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경제 발전을 위해 기업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 했고 가부장제는 가정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프랑스혁명 이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그리고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간에서 인류는 개인의 가치를,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것을 동력으로 역사적 변화를 추동해왔다.
모든 누적된 역사에 힘입어 어린 세대로 내려갈수록 개인주의를 더 강하게 열망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이제는 온라인 플랫폼을 주축으로 한 국가와 기업의 서비스도 개인화(personalization)라는 일관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신을 위해 살 필요도 없고, 국가나 민족을 위해 살 필요도 없다.
기업이나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필요도 없다.
이런 태도가 불편한 사람들은 개인의 희생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거나, 자신이 이미 희생한 게 억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개인주의가 차갑고 위험하고 근대화와 자본주의가 낳은 고쳐야 할 병폐라고 공격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야말로 결국 이기심이나 복수심의 발로에 불과하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삶의 중심에 놓는 태도다.
여기서 개인이란 자기 자신이 아니다. 서로 완전히 다르고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두 개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주의는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다르다.
이기주의는 엄밀히 말해 개인주의의 적이다.
'나'라는 개인을 위해 '타인'이라는 개인을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개인주의의 정확한 반대말이다.
전체주의는 무리를 이뤄 집단을 만들고 집단의 규칙에 어긋나는 개인을 차별, 혐오, 배척, 억압하려는 태도이다. 개인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야말로 인류 역사 최악의 병폐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의 궁극적인 완성이다.
우리는 개인이 특정 권력자나 집단에 의해 피해를 보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철학을 발전시켜 왔다.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대변자인 것처럼 주장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사실 전체주의자이다. 정치공학의 기본은 갈등을 이용해서 집단을 갈라치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가짜 민주주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오직 개인주의에서 나온다. 다수결로 상대편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들의 온전한 가치를 재조명해주려는 태도가 진정한 민주주의다.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의 어원을 따져보면 부정을 뜻하는 'in-'과 나누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dividual'의 합성어로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한다.
즉, 원자처럼 쪼개고 쪼개다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고유한 단위가 바로 '개인(individual)'인 것이다.
어떤 MBTI나 혈액형도 개인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출신, 성별, 학력, 직업, 재산, 취향도 개인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시대가 변하며 우리 가치관에도 개인주의가 많이 스며들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개인'을 '집단'으로 묶어서 설명하는 것에만 익숙하고 '집단'을 '개인'으로 쪼개서 바라보는 것에는 덜 익숙하다.
그래서 진정한 개인주의자로 살기 위해서는 인류의 역사적 연습과 단련이 아직은 좀 더 필요하다.
어떤 연습이 필요한 걸까?
그리 어렵지 않다.
편견 없이, 혐오 없이,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 그 존재를 대하면 된다.
그러면 그 존재가 가진 기존의 언어와 편견으로 담을 수 없는 풍부함과 고유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우주이고 그 우주는 MBTI 따위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풍부하며 또한 늘 변화한다.
그래서 어렵지 않지만 어렵다.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본다.
스티브 잡스가 영감을 받았다는 윌리엄 블레이크 시의 한 구절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듯 한 사람의 개인에게서 우주를 보면 된다.
태양은 그 눈부심으로 다른 별빛을 압도한다. 그래서 낮에는 다른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들은 모두 저마다의 반짝임을 가지고 있다. 주변을 압도하는 빛과 조명들을 제거할수록 별들을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 사실 그 별들도 정확히는 항성이다. 즉, 그들의 태양계에서는 태양이다.
우리는 신, 국가, 사회, 민족, 기업 등 거대 구조물들의 눈부심으로 개인을 압도하려 하지만 모든 개인은 그들의 태양계에서는 태양이다. 소설가 이영도가 말한 것처럼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태양에 눈 멀지 말고 별을 바라봐야 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유명한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우주는 곧 수(數)였고, 수는 곧 음(音)이었다.
피타고라스는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그들의 좌표 속에서 각자의 고유한 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마 이들은 밤하늘의 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개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더 풍성한 오케스트라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개인주의자이되 더 따뜻해져야 하고, 따뜻하되 질척이지 말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집단에서 모난 개인에게 가혹하다. 우리 시대의 개인주의자들은 이 가혹함을 이겨내기 위해 좀 더 서로를 존중하고 세상에 맞서기 위해 연대할 필요가 있다.
이 우주를 따뜻하고 다정한 개인주의자로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