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개인주의자로 살기
온전한 개인의 가치에 대하여
<퀸스 갬빗>이란 넷플릭스 드라마가 있다. 가장 애정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중 하나다.
스토리 자체는 진부하다면 진부하다. 체스가 남자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60년대 미국에서 편견과 약물중독을 딛고 정상에 오르는 천재 고아 소녀의 이야기다.
오히려 이 드라마의 매력은 스토리가 아닌 '베스'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있다. 사람들이 남자들 속에서 체스를 두는 베스에게 '여자가~' 어쩌고 하며 성별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면, 베스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며 ‘그게 체스랑 무슨 상관? 나 체스 잘해.’ 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물론 체스 실력으로도 논란을 평정한다.
그러니까 베스는 사람들이 뭐라 하든 남자다운 것도 여자다운 것도 아닌 그저 "베스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게 이 캐릭터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체스를 잘하는 베스." 그것이 베스라는 자아를 지탱하는 핵심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을 지탱하는 핵심이 되는 자아는 무엇인가? 당신을 당신답게 만드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자신을 소개할 때 베스처럼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거론한다.
"ㅇㅇ학교 ㅇ학년 ㅇ반 누구", "ㅇㅇ학과 ㅇㅇ학번 누구", "ㅇㅇ회사 ㅇㅇ팀의 누구". 이런 식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는 대개 우리가 소속된 그 어떤 집단의 정체성으로도 온전히 설명될 수가 없다. 전체로 대변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개별적인 특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이 소속된 집단과 완전히 동일한 가치관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것이다.
(1) 당신이 그 집단의 최고 권력자이거나,
(2) 그 집단이 획일화된 전체주의적 집단인 것이다.
오늘은 이 중에서 '전체주의(totalitarianism)'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전체주의는 보통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제국주의 등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개인의 활동은 모두 전체(국가, 민족, 집단)를 위해 종속되어야 하고 심지어 희생되어도 마땅하다는 사상이다.
요즘처럼 개인화된 시대에 누가 그런 사상을 믿겠느냐며 이제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상 취급하기 쉽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당장 우리의 평소 언행을 보자.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명백히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반복해서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다.
"[ A ]는 [ B ]잖아."
여기서 A에 "한국 사람들"을 넣고 B에 "성질이 급하다"를 넣어보자.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잖아."
명백한 오류이지만 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의 유형이다.
주어 A의 위치에 특정 사회적 집단이 들어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다.
당신은 이 주어 A에 아래의 집단들을 단 한 번도 넣은 적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 동네 사람들은~", "경상도는~", "전라도는~"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은~", "일본인들은~"
"남자들은~", "여자들은~"
"기독교는~", "불교는~", "이슬람은~"
"ㅇㅇ학교 출신들은~", "ㅇㅇ동아리 사람들은~"
"공무원들은~", "장사하는 사람들은~"
"우리 부서 사람들은~", "그 회사 사람들은~"
이런 문장을 통해 우리는 특정 집단(전체)의 정체성에 대한 프레임을 만든다. 이 프레임은 단순히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 걸로 끝나면 좋겠지만 때때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대체 우리는 왜 그러는 걸까?
그건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이루지 못한 대규모 사회 집단을 형성하면서 생태계의 일인자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동물의 왕이라는 사자도 최대 40여 마리의 무리밖에 형성하지 못하고, 인간에 가깝다는 침팬지 무리도 60여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현재 대한민국 인구는 5천만 명이다. 미국은 3억, 중국은 14억이다. 인류는 지구 역사상 그 어떤 동물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무리, 즉 '국가'라는 이름의 사회를 형성했다.
인간이 집단을 만드는 데 특화된 방식으로 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인간을 모아놓는다고 무조건 집단이 성립되는 건 아니다. 그냥 지리적으로 모아놓기만 해도 집단을 형성할 수 있다면 왜 국경선이 필요하겠는가. 언어, 문화, 종교, 이념 등 이들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정체성을 함께 만들고 경험하도록 해야 비로소 집단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회사 사람', '우리 학교 친구', '우리 팀' 등 고유의 이름이 붙여진 동질의 활동을 수행하는 집단이 필요한 것이다. 회사나 학교는 규모가 크지 않으니 비교적 동질감의 실체가 명확하다고 치자. 국가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이름을 붙이고 5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기 위해서는 이들이 동질의 집단이라는 '믿음'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이러한 작업을 대대적으로 수행했던 시기가 있다. 바로 중세에서 근대(modern)로 넘어가던 시기다.
이 시기 인류는 국민국가를 형성하면서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생겨난다. 우리는 단일민족 개념을 중시하는 국가라 이 둘을 구분하려 하는 편이지만, 보통 영어로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으로 부르면 되니 본질적으로 크게 구분되는 개념은 아니다. 결국 대규모의 인류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언어, 문화, 혈연 등을 동원하여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같은 국가의 국민'이란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업이 바로 이 시기 인류가 했던 작업이다.
실제로는 동질의 집단이 아닌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존재하는 자아들을 하나의 거대 집단으로 만들기 위해 규칙과 기준을 정해 묶어놓은 것이 국가다. 즉, 국가란 인류가 필요에 의해 대규모 집단에 이름을 붙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전체주의는 이런 인류 발전방향의 연장선상에서 딸려 나온 부산물 같은 것이다. 국가를 만드는 과정은 결국 전체에 개인을 동기화시키는 과정이었고, 전체에 개인을 동기화시키려는 경향을 좀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전체주의가 탄생한다. 인류는 전체주의와 맞서 싸웠지만 전체주의는 아직 우리의 사고관 속에 DNA처럼 뿌리 깊게 남아 있다. 결국 그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까지가 내셔널리즘이고 어디까지가 전체주의인가.
경계선은 사실 명확하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정상과 비정상(혹은 우월과 열등)"의 구분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래서 차별과 배제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순간부터 전체주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이나 자신들을 정상적이고 우월한 기준으로 삼고, 나머지를 배제하거나 차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국가 단위로 그 일을 저지른 것을 역사적으로 전체주의라고 불렀지만, 사실 인종, 민족, 종교, 성별, 학벌, 혈연, 직장, 출신 등 일상에서 차별을 저지르는 것도 그 집단의 규모가 국가보다 작을 뿐 본질은 똑같은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무리를 형성하고자 하는 성향은 본능에 가깝다. 자기가 소속된 집단이 더 강력하고 거대한 집단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인류가 유인원을 벗어난 그때부터 생겨난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집단의 가치를 내재화하려는 욕망이 생기고, 자기 집단에 포섭되지 않은 집단을 공격하고 차별하려 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대규모 정체성을 만들어야 했던 근대 사회는 국가, 민족, 회사, 사회의 지향, 즉 "전체"의 지향과 "개인"을 일치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전체의 가치에 너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건 '사회부적응자'이고 '잘못된 것'이고 '비정상'이라고 공격하고 비난하고 처벌해 왔다.
하지만 지금의 인류는 이런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는 역사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여러 차례의 전쟁과 식민지, 학살, 착취, 노예제도와 같은 아픈 역사를 겪고 나서야 가까스로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오로지 더 큰 집단을 만들기 위해 달리기만 하던 폭주기관차가 드디어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인류가 애초에 사회를 만들고 국가를 만든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제약과 맹수의 습격,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더 큰 집단을 지향하며 국가를 만든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근대인들은 요즘 사람들이 너무 개인주의(individualism)적이라며 비난하지만 그 개인주의자들이야말로 근대가 낳은 전체주의의 한계를 넘어 목적과 수단이 제자리를 찾게 해 줄 주인공이라 생각한다.
아이폰을 처음 샀을 때 PC에서 동기화(Sync) 버튼을 누르는 게 왠지 무서웠다. 폰에 저장되어 있는 내 소중한 데이터들이 날아갈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내가 소속된 집단들은 여전히 집단 전체의 목표와 가치에 나를 동기화시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전체와 동기화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내 소중한 자아가 사라질까 봐 무섭다. 동기화 버튼이란 별생각 없이 쉽게 눌러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한 개인주의자로 남자.
나는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해 존재하는 나사가 아니며, 나의 자아는 집단의 정체성으로 결코 설명할 수 없다. 내 소중한 자아를 지키는 것과 동시에 내가 속한 집단이 집단에서 소외된 다른 누군가의 자아를 배제하거나 공격하지 않도록 방어하자. 전체주의란 전염되는 속성이 있어서 타인의 자아를 지켜야 내 자아도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