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닝리 단편소설
잘 있어라, 이 회사원들아
(상)
그 사건의 시발점은 4월의 마감 회식이었다.
잔인한 4월, 실적 달성을 못해서 퇴근 직전까지 한바탕 깨지고 온 터라 회식 분위기가 영 안 좋았다. 애써 꺼낸 대화가 자꾸 끊겨 다들 엄한 술잔만 노려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정 대리가 자신의 초능력을 고백했다.
“저, 왠지 타임 슬립(Time Slip)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영업부가 실적을 잃으면 나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소 철학에 따라 누구보다 침통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던 윤 부장과,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함께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부서원들의 시선이 한순간 정 대리에게 쏠렸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정 대리, 분위기 파악 좀 하지?”
정적을 깨며 먼저 치고 나온 것은 박 과장이었다. 윗사람들에게 MZ 세대 군기반장으로 불리는 그였다. 박 과장도 엄밀히 따지면 밀레니얼 세대, 즉 MZ 세대의 최전방 어딘가에 속해 있었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라떼는 말이야’부터 ‘요즘 애들은’까지 꼰대스러운 말들을 더욱 거리낌 없이 시전하는 패기를 보였다. 정 대리가 보기에는 속칭 ‘젊은 꼰대’였다. 당신들처럼 인상 팍팍 쓰면서 침울하게 술 마신다고 실적이 나올 것 같으면 내가 이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겠다는 말이 목구멍 언저리까지 차오르려는 그때 윤 부장이 말했다.
“아니야, 박 과장. 정 대리가 분위기 한번 살려보려 한 거 같은데 왜 그래? 괜찮아. 정 대리, 얘기해 봐.”
윤 부장은 박 과장의 멘트가 자신을 고지식한 옛날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 썩 마음에 안 들었다.
정 대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시간을 이동하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제가 분명히 어제 사무실에서 야근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아침이 돼서 사람들이 출근하고 있더라고요.”
그날 술자리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웃음이 빵 터졌다.
“잠들었네.”
“정 대리 기면증 아냐?”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난 지난 주말이 순삭됐다.”
“이야, 정 대리. 그런 식으로 야근했다고 어필하나?”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니, 이게 어제 하루만의 일이 아니고요. 올해만 벌써 세 번째예요. 제가 뭔가에 집중해서 이마를 짚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미래로 시간이동을 하게 된다니까요?”
정 대리는 웃으라고 한 얘기가 아니라는 듯 다시 한번 정색하며 말했다. 그게 더 웃겼다.
“아, 그거 혹시 이 포즈 아냐?”
박 과장이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모아 이마에 갖다 대며 놀렸다.
“그건 드래곤볼에 나오는 순간이동 포즈잖아?”
덕분에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드래곤볼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다소 민망해진 정 대리가 옆에 있던 후배 사원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너는 뭐 초능력 같은 거 없니?”
올해로 입사 2년 차인 이 사원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이게 초능력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저도 그런 이상한 경험이 있어요. 저는 저도 모르게 숫자가 막 바뀌어 있더라고요.”
“숫자?”
“그러니까 보고서 같은 데 있는 숫자 있잖아요. 맞다. 그날도 분명히 저는 품의서에 200만 원을 썼는데 부장님께서 부르셔서 가보니까 330만 원으로 바뀌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 사원이 입사 이래 가장 크게 혼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분기 매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다들 날카로워져 있던 날이었다. 대체 매번 노력해도 달성하지 못할 목표는 누가 무엇을 위해 정하는 것인가. 그날 이 사원을 뭐 잡듯이 혼냈던 윤 부장은 눈을 감고 소주를 한잔 들이켰다.
“에이, 잘못 본 거겠지. 너 그래서 그날 엄청 깨졌잖아.”
정 대리의 핀잔에도 이 사원이 자기주장을 이어갔다.
“아뇨.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왜냐하면 그날이 3월 30일이었거든요.”
“그럼 그것 때문이네. 숫자 입력하다가 달력 보고 헷갈린 거지.”
“그래, 다들 그런 경험 많아. 한번 잘못 보기 시작하면 여러 번 다시 봐도 발견 못하고 그래.”
품의서 작성에 실수한 걸 초능력이라고 하다니 이건 정 대리가 보기에도 선을 좀 넘은 것 같았다. 다들 본능적으로 윤 부장의 심기를 살피며 상황을 적당히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막내 사원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도 그날은 제가 잘못 봤겠거니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달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거래처에서 입금을 분명 잘못했거든요. 500만 원이 들어와야 하는데 제가 실수로 100만 원만 청구한 거예요. 세금계산서에 100만 원이 찍혀 있는 걸 보고 큰일 났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전화했더니 거래처에서 무슨 소리냐고, 500만 원 보냈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다시 전산을 보니까 조금 전까지 100이었던 숫자가 모조리 500으로 바뀌어 있는 거예요. 여기서 더 놀라운 게 뭐냐면…”
막내 사원은 한참 동안이나 뜸을 들이더니 마침내 벽에 달린 시계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 순간 제가 시계를 보니까 정확히 5시 00분인 거예요!”
예상치 못한 멘트에 술자리에 큰 웃음이 터졌다.
“이야, 없는 초능력 짜내려고 애쓴다. 노력상 감이야, 노력상.”
“이 사원, 숫자 잘못 보는 것도 이쯤 되면 습관이야.”
“진짜면 오늘 술자리 계산서도 좀 바꿔볼래?”
“그래, 오늘이 4월 30일이니까 430원으로 좀 바꿔봐.”
또다시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윤 부장도 이제 슬며시 미소 짓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타고 이번에는 술자리 내내 조용하던 한 차장이 말을 꺼냈다. 부드러운 저음으로 늘 조곤조곤 말하면서도 좌중을 집중시키는 능력이 있는 한 차장이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누구나 초능력이 하나씩은 생기지. 나는 뭐랄까. 차로 치면 자율주행 모드가 생겼어. 이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자동으로 반응한다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뭔가 떠들면서 회의도 하고 일도 하고 있다니까.”
“차장님, 그거 유체이탈 아니에요? 드디어 영혼 없이 일하는 경지에 이르신 거죠.”
슬슬 술기운이 오르는지 위아래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 박 과장이었다. 허허 웃는 한 차장을 뒤로하고 드디어 윤 부장도 나섰다.
“나도 생각해 보니 초능력이 하나 있네. 텔레파시 알지? 내가 그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어. 꼭 말로 안 해도 내가 텔레파시를 보내면 우리 직원들이 알아서 움직이더라고.”
“에이, 부장님. 그건 직원들이 눈치가 좋은 거죠.”
“정 대리, 부장님이 간접적으로 직원들 칭찬하신 거잖아.”
“앗, 그런 거였군요. 죄송합니다! 부장님.”
영업부가 초능력을 주제로 이렇게 대동단결하게 될 거라고는 아마 유사 이래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초능력이 있으면 뭘 하나. 실적 하나 달성을 못하는데.”
모처럼 훈풍이 불던 술자리에 갑자기 윤 부장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한참의 정적.
“진짜 내일 우리 어쩌죠? 1분기를 말아먹어서 목표를 조정해 줬는데도 달성을 못했으니 상무님이 우릴 잡아먹으려 들 것 같은데. 정 대리 초능력으로 다음 달로 타임슬립이라도 하고 싶네.”
한 차장의 말에 다들 우울해져서 각자 잔만 홀짝거렸다.
“다음 달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나요? 애초에 우리가 제출한 목표에 억지로 더 얹어줘서 달성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고서는 달성 못했다고 괴롭히니 원.”
그때 윤 부장이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우리 초능력으로 실적 한번 해보자!”
“부장님?”
“다 죽을 판에 초능력이든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이대로는 부서고 뭐고 다 없어지게 생겼어. 솔직히 내가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지금 위에서 우리 어떻게 보는지 알아? 가망 없다는 말 같은 거 할 여유조차도 없다고! 잠깐 그 문서 다시 한번 보자.”
윤 부장의 말에 한 차장이 퇴근 전에 출력했던 마감 실적 파일을 꺼냈다. 내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바로 임원실에 보고해야 하는 문서였다. 윤 부장은 한참 동안 문서를 노려봤고, 분위기는 다시 엄해졌고, 다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결국 참다못한 박 과장이 말을 꺼냈다.
“부장님, 계속 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아 맞다. 내가 아니라 이 사원이 봐야지. 너 숫자 바꿀 수 있댔잖아. 많이도 말고 목표 달성률 딱 100%만 맞추자. 아까 거래처한테 했다는 것처럼 어떻게 좀 해봐. 지금 마침 10시네.”
“10시 00분이면 100%가 아니라 1000% 아닙니까?”
“백이든 천이든 뭐라도 좀 해봐.”
느닷없이 종이를 건네받은 이 사원은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꽤 심각한 표정으로 문서를 집중해서 쳐다봤다. 윤 부장의 단호한 기세가 술자리 분위기에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했다. 다들 좀 전까지 술에 취해 헤롱거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사원은 그 몰입감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문서를 째려봤다. 정면으로도 보고 측면으로도 봤다. 다들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봤다.
째깍째깍.
침묵 속에 윤 부장의 손목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물론 문서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다시 째깍째깍.
10시 정각이 되었다. 문서의 숫자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결국 모두에게 현실 자각 타임이 왔다. 윤 부장이 지갑에서 주섬주섬 법인카드를 꺼내며 이 사원에게 물었다. 부장답게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너 계산서 숫자도 못 바꾸지?”
“죄송합니다, 부장님.”
“그래. 이거 들고 가서 계산해 달라 그래.”
그렇게 다들 거나하게 취한 채 술집 밖으로 나왔다.
어영부영 지하철 역으로 가기 위해 회사 건물 앞을 지나가는데 박 과장이 갑자기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어이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