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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닝리 May 25. 2021

잘 있어라, 이 회사원들아  (하)

미닝리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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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라, 이 회사원들아
(하)





 “과장님, 괜찮으세요?”


 길바닥에 드러누운 박 과장은 달려온 정 대리를 바라보다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어? 오늘 보름달이네?”


 그 말에 다들 늑대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한꺼번에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바라본 하늘에는 가로등보다 더 크고 환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오늘이 보름이었나?”

 “이상하네, 분명 며칠 전에도 보름달이었던 것 같은데.”


 박 과장은 빨간 보도블록 위에서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아니, 대체 누가 인도 한복판에 이런 말뚝 같은 걸 박아놓은 거야?”

 “경쟁사가 꽂은 거 아닐까요? 우리 실적 못하라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머뭇거리기에 밤은 늦었고 막차 시간은 다가와 있었다. 슬슬 다시 가던 길을 가려는 찰나 박 과장이 한마디를 던졌다.


 “보름달에 소원이나 한 번 빌고 가시죠?”

 “늑대인간으로 변신하지나 마세요. 과장님.”


 그러자 갑자기 박 과장이 정 대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나도 비밀이 하나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보름달에 소원을 빌면 그게 어떤 식으로든 꼭 이루어졌어. 이 회사도 그렇게 입사한 거라니까.”


 박 과장이 어깨동무를 한 채로 눈을 감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빈 걸까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고 정 대리도 마음속으로 막연한 소원 같은 걸 빌었던 것 같다. 마술 같은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간밤의 일이야 어쨌든 여느 때처럼 모두 출근했다.


 윤 부장은 유난히 긴장한 표정으로 임원실에 들어갔고, 잠시 후 임원실에서 고성이 들렸다. 물론 1분기에도 내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분위기가 안 좋긴 했지만 임원실 바깥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해에도 목표를 한참 달성하지 못해 올해는 목표를 적게 받았지만 그래도 달성할 수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자신의 목숨줄도 위태롭다고 느낀 임원이 화를 낼 만도 했다. 그런데 화를 낸다고 실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어느 누가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겠는가.


 다들 숨을 죽이고 모니터만 노려보며 일하는 척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저렇게 지르고 있는지 벽을 통과한 소리가 뭉개지는 와중에 한 마디라도 알아들어 보려 애쓰면서.


 잠시 후 쫓겨나듯이 나온 윤 부장이 뭔가 해탈한 표정으로 부서원들 앞에 섰다.


 “다들 들어와 보래.”

 “네? 임원실에요?”

 “어. 우리가 다 정신 못 차리는 것 같다고 직접 말씀하셔야겠대.”


 한 차장이 조용히 다이어리를 들고 일어서자 다들 똑같이 다이어리를 집어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대체 다이어리가 왜 필요한지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따위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담당 임원은 처음에는 조용히 타이르는 말투로 시작했다. 하지만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지 우리 때는 말이야 하면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요즘 영업부는 영업부 같지가 않다며 삿대질과 고함을 병행해 가며 한 명 한 명 실적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추궁하기 시작했다. 물론 답변하거나 해명할 시간은 주지 않았다. 모욕감을 주면서 추궁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었을 뿐이다.


 너무나 구시대적인 영업관리 방식에 질린 정 대리는 애써 현실을 회피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 사원은 담당 임원이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흔들고 있는 영업부 실적 서류를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숫자를 바꾸려는 건가? 한 차장은 의외로 다이어리를 잘 활용하고 있었다. 임원이 말하는 걸 메모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간간이 호응 수준의 과하지 않은 답변을 하기도 했다. 저게 자율주행 모드인가? 박 과장 말마따나 영혼은 없어 보였다.

 뭐야, 다들 어제 말한 초능력을 잘 사용하고 있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웃어?”


 누구를 향한 말인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임원이 정 대리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내 말이 우습지?”


 우습다니요? 하나도 안 웃겨요.

 겉으로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우물쭈물 되새김질하며 갈 곳 잃은 시선이 우주를 헤매자 임원의 타깃은 자연스럽게 정 대리가 되었다. 임원이 서류를 펼쳤다.


 “501만 원? 니 월급 값도 못하는 이게 실적이야? 대체 영업을 어떻게 하면 이런 숫자가 나오는 거야? 1만 원은 또 뭐야? 회사가 장난이야!”


 이상했다. 정 대리도 지난달 실적이 저조하긴 했지만 501만 원은 아니었다. 어제 임원실에 들어가는 문서의 숫자도 분명 크로스 체크했었다.


 “저…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잘못되긴 뭐가 잘못돼? 여기 떡 하니 501만 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니 실적도 제대로 몰라?”


 임원이 눈 앞에 들이댄 출력물에는 정말로 501만 원이 찍혀 있었다. 그 순간 정 대리는 오늘이 5월 1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근로자의 날’에 ‘근로’하기 위해 출근할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영업직의 애환이여…가 아니라 지금 정 대리에게는 5월 1일과 501만 원이라는 숫자의 신비로운 인과관계가 더 중요했다.


 정 대리는 이 사원을 돌아봤다. 이 사원은 정 대리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이 사원! 대체 뭘 바꾼 거야? 잠시 후 두고두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게 될 거친 말들이 정 대리에게 쏟아졌다. 급기야 임원은 정 대리의 어깨 부위를 결재판으로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아프고 치욕적이었다.


 궁지에 몰린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윤 부장이 외쳤다.


 “지금이야! 정 대리! 타임슬립 가동!”

 “네, 네? 부장님?”

 “뭐 하는 거야? 지금 당장 타임슬립!”


 임원은 물론 동료 부서원들까지 모두 얼빠진 표정을 짓는 순간 정 대리가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외쳤다.


 “타~임 슬립!”





 정 대리는 힘 없이 주섬주섬 책상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버릴 건 버리고 줄 건 주고 나니 별로 남는 게 없었다. 나의 회사 생활이란 게 이렇게 남는 것 하나 없이 허망한 거였구나.


 그날 임원실에서 윤 부장은 임원에게 정 대리가 좀 아픈 것 같다며 분명 머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니까 정신이 이상하다는 거지.


 사실 그보다 정 대리가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날 임원실에서 윤 부장의 외침을 정 대리 말고는 아무도 못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생하게 들렸는데 말이다. 정신이상으로 몰려 퇴사하는 기분이란. 산재 신청이라도 해보라는 박 과장의 말에 헛웃음도 안 나왔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퇴사하는 길, 동료들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마중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윤 부장의 표정과 마주한 순간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윤 부장의 입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텔레파시를 쏜 걸까.


 회사 정문을 나서자 탁 트인 보도블록이 레드카펫처럼 활짝 펼쳐져 있었다. 왜 그때만 유독 타임슬립이 작동하지 않은 걸까. 정지선 대리, 아니 이제 대리가 아닌 인간 정지선은 그게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시간, 자신이 반드시 겪어야만 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라 여기기로 했다. 결국 이렇게 회사를 나갈 운명이었던 거지. 모든 초능력들이 자신을 이 길로 인도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힘차게 걸어 나가자.


 잘 있어라, 이 회사원들아!



< 끝 >



이 초단편 소설은 저에게 아주 오래 미뤄둔 숙제 같은 소설입니다. 약 5년 전 시놉시스를 쓰고 나서 회사 동료들에게 "나 이 소설로 데뷔하면 퇴사할 거야"라는 망발을 일삼았는데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네요. 물론 데뷔는 못했으니 퇴사도 안 하는 걸로. 누가 저에게도 초능력 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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