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닝리 Jul 14. 2021

브레멘으로 가자 1. 당나귀 편

미닝리 단편소설


 오직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던 나기한 차장이 있었다.


 그는 일이 좋았고, 회사를 사랑했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책임져 주는 회사에 늘 감사했다. 바쁜 회사였다. 결혼 후 떠나기로 했던 신혼여행도, 아내의 출산일도, 중요한 가족 행사가 있던 주말도 모두 회사 일정 때문에 반납했다. 그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일을 했다. 그렇게 헌신하는 길만이 회사가 잘 되는 길이고, 또한 자신이 회사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희망퇴직 대상자라는 통보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충격이었다. 언젠가는 회사를 떠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부장도 되기 전에 내쳐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평생을 회사에 헌신한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회사를 나오자 당장 동료라고 믿었던 사람들과 연락이 끊겼다. 오랜만에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자니 어색하고 서먹했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 더 즐거워 보였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할 줄 아는 일도 없어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는다는 핑계로 PC방에서 웹 서핑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팝업창 하나가 모니터에 떡하니 날아와 붙었다.



 브레멘 라이브 클럽, 밴드 급구 (즉시 공연 가능)


 

 나기한 차장, 아니 기한이 까마득히 잊고 잊었던 20년 전 과거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죽을 때도 아닌데 왜 주마등 같지? 아, 내 퇴직금과 사망 보험금으로 가족들이 몇 년도까지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계산까지 해봤으니 사실상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인가.


 주마등 속 스쳐지나간 과거는 지금의 기한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반항기였다. 홀린 듯 집으로 돌아가 사진 앨범이란 앨범은 모조리 꺼내서 뒤지며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찾았다. 있었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그 시절을 온전히 보관하고 있는 그 사진이 그대로 있었다.


 사진 속 기한은 빨간 머리에 장발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조르고 졸라서 마침내 허락을 받아 낙원상가에서 샀던 새빨간 전자 기타를 들고 한껏 거만한 포즈를 잡고 있었다. 저 기타 지금은 어디에 있지? 내가 다시 기타를 칠 수 있을까?


 문득 사진  나머지 밴드 멤버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덤블링 팬더즈(Tumbling Pandas). 다들 술도 엄청나게 퍼마시던 시절이었다. 마치 도원결의를 하듯 밴드를 만들기로 맹세한 술자리 다음  아침, 서로의 얼굴을 보고 눈 주변에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다며 밴드 이름을 팬더즈로 하면 어떠냐고 키득대던 것이 진짜 이름이 되었다. 물론 20  그날 기한이 취업하면서 모두 끝나버렸지만.


 기한은 세상에 단 한 장 남은 덤블링 팬더즈의 사진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었다. 그래도 한 번씩 안부하며 지내던 베이스 견상근에게 그 사진을 전송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였더라. 전송이 완료된 후 바로 위의 문자가 발송된 날짜를 확인했다. 세상에! 6년 전이었다. 종종 안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6년이나 되었다니! 그 사이 전화번호가 바뀐 건 아니겠지?


 그때 진동이 왔다. 상근의 문자였다.


나기, 무슨 일 있냐?


 다행이다. 전화번호는 안 바뀌었구나. 그보다 '나기'라니 얼마만인가. 나기한을 그렇게 부르는 건 밴드 멤버들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일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어, 댕댕아. 나 회사에서 잘렸어.


 성이 견 씨라는 이유로 상근의 별명은 댕댕이였다. 귀여운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우락부락 거친 외모였지만 늘 직선적이면서 따뜻한 친구였다. 잠시 후 상근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면서 따뜻한 위로의 말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급한 목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야, 너 지금 어디냐? 잘린 건 양반이야. 난 아예 죽게 생겼다."



>> 2편에 계속 >>





< 작가의 말 >

"오직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당나귀가 있었다."

vs "오직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던 나기한 차장이 있었다."

사실 '당나귀'의 위치에 고유명사인 사람 이름이 들어가게 되면 자연스럽지 않은 문장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문장만큼은 동화책처럼 시작하고 싶었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잘 있어라, 이 회사원들아  (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