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착한 사람들의 것이다
미래의 한국.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라고 누군가 딱 한 달 전 SF 소설에 썼다면, 개연성이 없다고, 에이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건 말도 안 된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에서 군대를 이용해 국회와 국민을 장악하고 다시 언론과 출판을 검열한다고?
SF적 상상력조차 뛰어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놓고 자신은 정당하며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는 사이코패스를 대통령 자리에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법이다. 이건 군사 독재를 시도한 행위를 옹호하느냐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느냐의 문제라서, 정치적 성향을 따질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본업을 팽개치고 국회로 달려 나갔다.
나는 요즘 잠을 일찍 잔다. 그래서 계엄을 선포하던 당일에도 쿨쿨 자다가 다음 날 새벽 모든 사태가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음에도 큰 충격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하물며 당일 밤에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본 이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그때 잠든 게 세상에 미안하기도 하고, 반성이라고는 1도 없는 뻔뻔한 대국민 담화에 너무나 화가 나서 나도 잠깐이라도 힘을 보태자는 생각에 탄핵 당일 국회로 향했다.
그렇게 국회로 가는 길. 토요일임에도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국회의사당역과 여의도역 무정차 통과로 당산역에 내려야 했다. 아빠와 함께 지하철을 탄 한 아이는 만원 지하철에서 앉으라고 권해도 다들 힘들게 가는데 괜찮다며 앉지 않고 서서 가겠다며 결연한 태도를 보였고, 어떤 연인이 이 사람들 다 우리와 같이 여의도에서 내릴 것 같다고 떠들자 사람들이 피식거렸다. 대부분 맞았기 때문이리라.
당산역에 내려서 혹시 인터넷이 잘 안 터지면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하는 고민은 그야말로 기우였다. 함께 내린 모든 사람들이 같은 목적지를 향해 줄지어 걸어가는 장관이 펼쳐졌다. 어떤 이들은 혹시라도 집회의 정당성이 엉뚱한 걸로 흠집이 잡힐까 봐 그랬는지 앞사람이 떨어뜨린 쓰레기까지 주워서 챙겨가기도 했다.
마침내 국회로 건너가는 다리.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이 좁아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마치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온 것처럼 다리를 건너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고, 나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세 사람과 나란히 줄 서 있었다. 이 추위에 집회에 가면서도 코트를 챙겨 입고 온 멋쟁이들은 느닷없이 좀비 바이러스에 대한 엉뚱한 얘기를 시작했다. 기다리기 지루했던 거다. 오물풍선에 생화학무기를 탑재할 수도 있다던데, 지금 이 자리에서 갑자기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 어떻게 될 건가 하는 얘기였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군중들의 한복판에 있는 셈이니 아수라장이 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행 중 여자는 자기가 좀비가 되기 전에 인간으로 죽고 싶다고 했고, 남자는 좀비가 되어 사람들을 물어 뜯어보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 친구가 그래도 이렇게 정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가다가 좀비가 되는 거라면 좀비라도 자랑스러운 좀비가 아니겠냐는 말에는 그만 나도 웃음 짓고 말았다.
그래. 그곳엔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상상 속의 악은 낭만적이며 다채롭지만, 실제의 악은 음산하며 단조롭고 삭막하며 지루하다.
상상 속의 선은 지루하지만, 실제의 선은 항상 새롭고 놀라우며 매혹적이다.
- 시몬 베유
계엄으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처단하려 하다 탄핵당한 사람의 서사는 단조롭고,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하나도 안 궁금하고 지루하기만 한데, 그들과 맞서기 위해 한밤중에도 주말도 버리고 달려간 선량한 이들의 서사는 눈부실 정도로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며 매혹적이다.
악인은 소설 속에서나 매력적이지 현실에서는 착한 게 훨씬 매력적이라는 점을 새삼 상기한다. 그날 국회로 달려간 착한 사람들이 갖고 있을 그들만의 찬란한 서사가 궁금하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의 것이다.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