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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닝리 May 13. 2021

우주에서 인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의 날개> 우주의 먼지일지라도


지금 밤하늘에 보이는 저 별빛은 몇 억 년 전에 출발한 빛일까.


우주에 대한 지식을 접할 때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곤 한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이 거대한 우주의 시공간은 경외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우주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얘기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한한 우주에 대해 알고 나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며 평소처럼 매일 출근을 하고 학교에 가고 생활을 해도 괜찮은 걸까? 혹시 인류 전체가 뭔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별에서 온 우리들



태초에 폭발이 있었다.

물론, 그게 정말 태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주에 관해서는 저명한 과학자들이 현재까지 밝혀낸 것을 신뢰하는 방법밖에 다른 길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138억 년 전 빅뱅이라는 대폭발 후 약 46억 년 전 우리 태양계가 그 팽창운동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폭발의 여파로 인해 고속으로 회전하던 행성들 중 태양에서 세 번째쯤 위치해 있던 지구는 원시행성과 충돌하며 자전축이 기울어졌고, 그 덕분에 주기적인 기후변화와 달을 통한 조수간만의 차라는 엄청난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


하루, 한 달, 1년이라는 짧은 단위의 주기적인 반복운동은 그러한 반복운동과 동기화된 미생물을 만들고 이들이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등 더 복잡한 단계로 진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인류에 이른다.


버튼을 누르면 켜지는 단순한 에디슨의 전구에서 시작해, 0과 1의 언어를 활용해 복잡한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가 되고, 또 스스로 학습하는 알파고와 같은 AI(artificial intelligence)를 비롯해 시리, 구글 어시스턴트 같은 것들로 진화하는 것을 보면 단순한 구조의 생물이 복잡한 구조의 인간이 되는 과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수많은 반복운동과 팽창운동 등이 고도로 결합한 집합체인 것이고, 많은 과학자들이 증언하듯이 물질적 구성성분만으로 따지자면 낭만적이게도 별의 아이들인 셈이기도 하다.




광활한 우주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제는 지금부터다. 138억 년 우주의 역사를 1년으로 환산하면 인류의 역사는 고작 14초에 불과하다. 우주의 역사를 100년으로 환산해도 인류는 태어난 지 23분밖에 안 된 신생아 같은 존재다.


게다가 이 우주도 수명이 있다.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태양을 돌고, 태양은 우리 은하계를 돌고, 우리 은하계는 몇몇 은하단들과 모여서 우주를 돌고 있는데, 모든 운동은 에너지가 다하면 멈추게 되어 있는지라 추측할 수 있는 바에 의하면 약 54억 년 정도 뒤에는 태양도 지구도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과연 지구가 없어질 때까지 살아남을지, 아니 최소한 공룡처럼 1억 년이나마 지속될 수 있을지조차 현재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스스로 아무리 위대하다고 주장한들 전우주적 규모에서는 초미세먼지 취급이라도 받으면 다행일 정도의 미물이라는 의미다. 만약 1천 년 뒤에도 인류가 남아있어 현재의 '스마트폰'이나 '대통령'에 대한 기록을 본다면, 마치 지금 우리가 '청동검'이나 '마립간'에 대한 얘기를 듣는 느낌과 비슷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한갓 점에 불과한 지구에서도 초미세먼지 같은 인간들끼리 고대네, 중세네, 근대네 나누고 민족과 인종, 성별을 나누고, 자본주의네 공산주의네 다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1억 년까지 따질 것도 없이 고작 1천 년 뒤쯤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될 게 불 보듯 뻔한데.



인간에겐 인간의 시공간이 중요하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다. 각자 다양한 논리로 할 말들이 많겠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에겐 우리의 인생이 이 우주가 어찌 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주에겐 우주의 시공간적 관점에서 중요한 일이 있고, 개미들에겐 개미들의 시공간적 관점에서 중요한 일이 있듯이, 인간에겐 인간의 시공간적 관점에서 중요한 일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우주는 무한한 4차원이더라도 우리의 세계는 2021년 대한민국의 3차원 세계이며, 단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가 인류에게 의미 있는 현실의 전부라고 '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 <생각의 날개> 프롤로그에서 이러한 '상상력'의 한계 범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


그 '간주'하는 범위는 개인별로 모두가 다르겠지만 너도 나도 이 3차원 대한민국의 물질적 현실이 마치 고정된 시공간인 것처럼 '간주하고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모두가 동일하다. 쉽게 말해 “한국 사람들은 이렇잖아, 우리 회사는 저렇잖아, 정치인들이란, 공무원들이란, 아파트는, 비트코인은” 어쩌고 하면서 확고히 존재하는 실체인 것처럼 얘기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들이 말하는 모든 실체가 알고 보면 우주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원자들의 조합일 뿐이고 일시적 존재일 뿐이라는 건 잠깐 잊는다. 놀랍게도 우리 인류는 우리가 논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채 서로 사회적으로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의 암묵적 합의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사실은 누군가가 만들어내 고도의 시뮬레이션일 수도 있고, 무한히 분할하는 다중 우주의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소 '생활'을 할 때 다른 모든 가능성을 일단 괄호에 넣어두고, 너와 내가 함께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간주'한다. 그래야만 주변 사람들과 소통도 할 수 있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며, 심지어 내일도 이 세상에 해가 뜰 것이라 믿으며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실제론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 그렇다 치고' 일도 하고 대화도 하고 사랑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전제를 현존하는 거의 모든 인류가 깔고 살아가고 있다. 즉, 전적으로 인류의 현실적 필요성으로 요청된 암묵적 합의행위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암묵적 합의행위는 별다른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인간 아기가 태어나서 이 세상을 인지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자동승인' 절차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류에게는 인류의 시공간이 하루살이나 토끼, 고래, 거북이, 은하계의 시공간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류의 이중생활은 계속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라 간주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괄호 안에 넣어둔 문제들을 꺼낼 필요가 있다.


더 고차원의 사유와 깨달음, 삶과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 우주에서 국가와 민족, 종교, 인종, 성별, 이념에 대한 관념은 영원불변한 어떤 것이 아니며 늘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시점에 도달해 있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사유가 인류를 지금까지 성장시켜 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언제든 우리에게 생활의 문제가 닥쳤을 때 자유자재로 괄호 안에 질문들을 넣어두고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괄호 넣기와 풀기"가 우리 인류에게 필요한 철학적 능력이다.


이런 인류의 이중생활로 인해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시공간적 범주는 나날이 넓어지고 있지만, 실천할 수 있는 범주는 상대적으로 좁아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를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별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나뭇가지 끝에도 이르지 못한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게 슬프지 않느냐고.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별은 보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우주의 관점에서는 미시 생태계에서 한순간 반짝이는 일에 불과하겠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가며 다음 시대를 견인하는 거대한 흐름과 변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결국 우리는 그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각자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아니 최소한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간주'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결코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이 세상의 중심이라 간주하고 살아가는 이 놀라운 이중생활을 인류가 계속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자! 나도 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우리는 언젠가 이 우주 끝까지라도 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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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각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과 인식 범주를 어디까지 넘어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정답이라 믿는 것들이 진짜 정답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습니다. 찾은 답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행위조차 의심합니다. 질문과 의심, 호기심과 자유로운 생각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날게 해줄 거라 믿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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