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10주년 : 브런치와 함께 이룬 작가의 꿈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어릴 적 저는 소설가가 꿈이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판타지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언젠가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드래곤 라자처럼 세상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말하자면 저에게 판타지 소설가란 천 년 동안 전설처럼 내려오던 고대의 신탁이나 예언, 숙명 같은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파도 같은 운명이 봉인된 건 ‘일단’이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저주의 주문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단’의 저주가 처음 시작된 건 고등학교 때, ‘일단 대학부터 가서 생각하라’는 어른들의 설득에 청소년이던 저는 보기 좋게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꿈을 미루는 법’을 처음으로 체득한 것입니다.
한 번 미룬 꿈을 두 번 세 번 미루기는 너무나 쉬웠습니다. 일단 대학부터 가고, 일단 취직부터 하고, 일단 결혼부터 하고, 일단 아이부터 키우고, 일단 집부터 구하고, 일단 대출부터 갚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앞에서 꿈을 미룰 이유는 언제나 넘쳐났습니다. 결국 이렇게 미루다간 내 무덤 앞에서도 미루겠다 싶었죠. 일단 저승부터 가고.
아이가 자라고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고 나이라는 숫자가 서서히 무거워지는 순간, 포기했던 꿈이 제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죽어도 정말 삶에 아무런 후회가 남지 않겠냐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꿈을 미루는 것도 습관이라는 걸. 저에겐 ‘꿈을 미루고 공부를 먼저 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 당장 꿈을 향해 나아가라’는 가르침이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게 2021년이었습니다. 질문은 작은 불꽃이 되어 제 마음에 불을 지폈죠. 다 타버려 재만 남은 줄 알았던 제 마음 어딘가에는 아직 뜨거운 불씨가 있었습니다. 그래. 이대로 내 인생이라는 이야기가 회사원으로 끝나는 시시한 결말은 아직 보류야. 다시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 거야!
그때의 저는 뭐라도 써야겠다는 절박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판타지 소설가로 살고 싶었던 저의 어린 시절이 불쌍했습니다. 만약 시간여행을 해서 어린 나를 만났을 때 ‘그 꿈은 네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어차피 이룰 수 없단다’라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브런치를 시작했고 소설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퇴근 후 틈틈이, 가능한 규칙적으로 썼습니다. 대개 아이가 잠들고 나면 씻고 나와서 10시부터 잠들기 전까지. 성공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게 아니라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가 주는 행복감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 받고 연재하는 것도 아닌데 마감이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열심히 썼습니다. 브런치를 선택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제 글을 꾸준히 읽고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님들이 있었고, 서로 열심히 써보자고 독려해주는 작가님들이 있어서 꾸준히 쓸 수 있는 동력이 되었죠.
그렇게 1년가량 써 내려간 소설이 몇 편 쌓이고 나자 조금은 욕심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썼던 소설들을 하나씩 다듬고 정리해서 공모전에 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기대는 했습니다.
그런데 마법처럼 제가 브런치에 썼던 이야기들이 소소한 성취가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에는 AI가 인류를 지배하는 미래를 그린 SF 단편소설 ‘로딩’ 시리즈가 ‘대한민국 과학소재 단편소설 공모전’을 수상하면서, <반격의 로딩>이란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2024년에는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 뒤얽힌 오피스 판타지 소설 <잠자는 숲속의 대리님>이 ‘스토리움 로그라인 백일장’과 크레마클럽 오리지널에 선정된 뒤 책으로 출간되었고요. 그리고 지금은 브런치에 썼던 또 다른 장편소설 하나가 ‘스토리움 추천스토리’에 선정된 뒤 현재 출간 계약 중에 있습니다. 와! 이게 다 무슨 일일까요?
만약 그때 제가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2년 뒤 모아둔 소설을 공모전에 넣어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모전에 당선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저의 소설책이 세상에 나올 일은 더더욱 없었을 테죠. 제 삶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저 회사원으로 하루하루 살아나가고 있었을 거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소름이 돋습니다.
인생의 어떤 순간은 다른 순간들보다 너무나 중요해서 그 순간의 결정이 이후의 모든 세계를 바꿔버립니다.
분명한 건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에요. 시작한 뒤의 세계는 시작하기 전의 세계와 다른 차원이 됩니다. 이 작은 시작이 저를 어디까지 밀고 갈 수 있을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일단’ 미루지 말고 지금 쓰기 시작할 것. 우리가 쓴 것들은 항상 우리 자신보다 훨씬 위대하고 멀리 갑니다.
#브런치10주년작가의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