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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닝리 Oct 26. 2021

까꿍과 숨바꼭질에 담긴 철학

생각의 날개 : 아기의 우주 (2)



까꿍놀이가 왜 필요한가

- feat. George Berkeley



아기가 자라다 보면 '분리불안'이라는 것이 생긴다. 주양육자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현상으로 많은 양육자들이 아이를 키울 때 골치를 썩는 문제다. 잠깐 화장실을 갈 때조차도 화장실 앞까지 쫓아와서 문을 두드리며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울고 불고 눈물의 상봉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엄마 아빠의 사생활이라고는 인정해줄 생각이 없는 아기들이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식 관념론의 신봉자처럼 보인다.


버클리는 세상에 물질(사물)은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우리의 인식과 관념만이 존재한다는 '관념론(idealism)' 철학자이자 주교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명문대인 UC 버클리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믿는 게 다 정신의 작용에 불과하다니 그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지만, 오히려 시대를 돌고 돌아 최신 과학의 트렌드인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그리 황당한 소리만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아무도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냐고 양자역학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 호통을 쳤더니, 아무도 관측하지 않으면 달이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답하며 단숨에 과학을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양자역학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어쩌면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는 양자역학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얘기이지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는 황당한 소리인 게 맞다.

분리불안을 겪는 아기한테 엄마가 나간 뒤 문이 닫히면 엄마는 이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설명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


분리불안의 극복방법으로 대표적인 것은 "까꿍" 놀이이다.

알다시피 까꿍은 엄마나 아빠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거나 숨었다가 나타나면서 까꿍이라고 외치는 놀이다. 부모의 얼굴이 다시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무척 기뻐한다. 사라졌을 때의 긴장감,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의 안도감과 이완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의 엄마 아빠들이 공통적으로 행하고 있는 이 까꿍 놀이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존재한다'는 철학적 인식을 돕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마도 버클리 주교의 부모는 까꿍 놀이를 게을리 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가 인식하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자기 몸의 객관화, 숨바꼭질


숨바꼭질은 까꿍과 정확히 반대의 기능을 한다.

재미있게도 많은 유아들은 자신의 눈을 가리거나 얼굴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숨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이 뻔히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데 말이다. 만화 '원피스'의 토니토니 쵸파라는 사슴이 몸을 드러낸 채 숨는 행위는 사실 어린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마치 위협이 존재할 때 자신의 머리를 땅에 박는 타조들 같다.

실제로 많은 유아들이 얘처럼 숨는다. <이미지 출처 : 원피스 극장판 9기>


그래서 숨바꼭질이 필요하다. 숨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 '몸'이라는 것의 물질성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이다. 까꿍놀이가 자신이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문제라면, 이 숨바꼭질의 교훈은 타인이 자신의 존재(몸)를 인식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에 있다.


바로 존재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 말이다.


이렇게 인류가 까꿍과 숨바꼭질로 터득하게 된 철학적 이론을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 시대에서부터 유래된 그 유물론 말이다.

관념론(idealism)이 "우리는 '관념(idea)'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유물론(materialism)은 "우리 존재는 물질(material)로 구성된다"에서 철학을 출발시킨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우리는 아기일 때부터 이런 철학적 질문들과 마주하게 되며, 아기들은 관념론자에서 출발해 유물론을 체득하는 과정으로 성장해 나가게 된다. 혹자들이 유물론을 자연발생적 철학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존재의 객관성에 대한 깨달음은 단지 놀이일 때까지만 즐겁다.

안타깝게도 '물질 세계'의 견고함은 기쁨보다는 좌절을 불러일으킬 때가 더 많다.

다음 글에서는 아이들이 겪는 이 '좌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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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각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습니다. 찾은 답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행위조차 의심합니다. 질문과 의심, 호기심과 자유로운 생각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날게 해줄 거라 믿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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