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날개 : 아기의 우주 (1)
아니, 정확히는 내 아이는 왜 잠들지 않는가? 100일도 안 되어 풀잠(full+잠)을 잔다는 전설 속의 유니콘 같은 아기들도 있다던데. 몸 어딘가에 잠들면 위험 신호를 보내는 센서라도 달린 것일까? 아니아니 하나뿐인 소중한 아기를 다른 아기와 비교하는 건 금물! 그럼 역시 내 육아실력이 부족한 탓일까? 그런데 대체 왜 아기는 졸려 하면서도 잠을 편안히 못 자는 걸까?
아이가 자란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지만, 아기를 키울 때 잠을 설치며 반좀비(half zombie) 상태가 되던 그 당시에는 결코 웃어 넘길 수 없는 심각한 고민거리임에 틀림 없다. 이 글은 그러한 반좀비 상태에서 끄적인 괴생명체 같은 글들을 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다시 모아 정리한 내용이다. 오늘도 지구 어딘가에서 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을 모든 엄빠들을 응원하며.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가 시작된다.
육아의 시작은 아이의 '잠'에 대한 이해와 사투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생아는 약 2시간 간격으로 젖을 먹는다. 위장의 용량이 작기 때문이다. 2시간 간격이라는 것은 배고파서 울면 30분 동안 젖을 먹이고 다 먹으면 안아서 등을 두드리며 5~10분간 트림을 시켜야 하며(그래야 배탈이 안 난다고 한다) 또 다시 30분간 귀여워~이쁘다~ 하다가도 칭얼대면 재우기 위해 어르고 달래며 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이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을 시켜야 한다면 양육자의 휴식시간은 더욱 줄어든다. 이 과정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주양육자의 일과는 1시간 30분을 깨어 있고 30분을 쉬는 일을 종일 반복해야만 한다.(기본적으로 부부가 육아를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다. 백업 인력 없이 육아에 도전하는 건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독박육아존경)
아이마다 편차가 있지만 태어나고 100일~300일 사이에 이러한 생활패턴의 주기는 점점 길어지며 한번에 잠잘 수 있는 시간도 차차 늘어난다. 점진적으로 늘어나지는 않고, 어느 계기가 되는 날 갑자기 계단식으로 늘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100일의 기적이니, 200일의 기적이니 하는 말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건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서 '기적'이라 부른다는 걸 깨달은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우리 아이에게는 돌이 되도록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흐엉)
'밤에 잠을 잔다'는 평범한 문장이 아기에게는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것은 수면 패턴을 잡아주는 것이다. 혼자서도 점점 잘 자는 아이가 있는 반면 수면 패턴이 제대로 안 잡히는 아이는 돌이 지날 때까지도 밤새 불규칙적으로 깨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아이의 수면에 대해서는 많은 육아서적에서 나름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중 절반 이상은 "내 아이에게는 안 통하는" 방법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부모는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시도하며 자기 아이에게 효과가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하며 100% 정답인 방법론은 없는 셈이다.(아이는 A를 투입하면 A'가 나오는 코딩 인형이 아니다.)
하지만 대개의 유명한 방법론들의 핵심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루틴을 만들어주는 것, 즉 '규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막 태어난 아기에게 양육자가 제공하는 환경은 우주의 전부이다. 이 '우주'를 견고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 즉 이 방법론이란 아기의 세계가 일관된 규칙성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과정인 것이다.
- Feat. David Hume
규칙성의 의미를 이제 아기의 입장에서 재구성해보자. 잠깐 내가 신생아라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가끔 신생아일 때가 기억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기억보다 상상력에 의존하도록 한다.
신생아는 열 달간 어두운 뱃속에서 배고픔 없이 일정한 온도와 습도로 뒹굴거리며 살다가 별안간 세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바깥 세상은 자극적인 빛과 소리, 변화무쌍한 온도와 습도, 배고픔과 배변의 고통, 양수에서 벗어나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중력, 누군가 자기를 들어다 옮기는 사태가 자꾸만 발생하는 불안정한 시공간이다. 안전하고 일정하던 세상이 갑자기 매순간 급변하는 위험한 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는 이 생명체의 상태가 바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말한 '지각의 다발'들만 있는 상태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흄은 인간의 영혼이나 자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우리가 자아라고 착각하는 건 감각을 통해 인지하게 된 지각(知覺, perception)의 다발들일 뿐이라는 다소 무서운 주장을 했던 사람이다.
어쩌면 흄은 신생아일 때가 생생하게 기억나서 그런 주장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기에게 잠이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의식이 흐려지는 현상이다. 이것은 매우 불쾌하거나 두려운, 어쩌면 '이 세상이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이기에 울음을 수반한 '잠투정'이라는 게 생긴다. 아이는 매 순간 잠과의 싸움을 벌인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 세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아이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자신이 자는 동안에도 세상은 온전하게 무사히 존재하리라는 확신이 들어야 비로소 아이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기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 바로 '규칙성'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자고 일어나면 모유나 분유를 먹는다. 먹고 나면 모빌을 보거나 활동을 하며 논다. 놀고 나면 잔다. 잠들 때도 조용한 음악을 틀거나 자장가를 부르고 동일한 방에서 잠드는 등 일정한 '수면의식'을 행하면 더 잘 자는 아이가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작은 일과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것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삶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인지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잠들었다가 깨어나도 같은 일과가 반복될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즉, 이 시기 부모가 조성하는 일과의 규칙성이란 아이에게 우주의 견고한 물질성을 가르쳐주는 철학적 교육과정인 셈이다.
이를 통해 '지각의 다발'들은 비로소 지상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내가 자고 있을 때도 이 세상은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믿음을 획득하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니!
아니, 사실은 어른인 나도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견고하다 믿어왔던 나의 세상이 내일 갑자기 붕괴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은,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주를 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적어도 아기에게는 조금 더 자란 후의 일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 이 글의 대표 이미지는 필자의 아이 사진입니다. 무단도용을 금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습니다. 찾은 답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행위조차 의심합니다. 질문과 의심, 호기심과 자유로운 생각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날게 해줄 거라 믿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