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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닝리 Oct 01. 2021

구술사, 세상에 기록된 적 없는 유일한 역사

유일함의 미학 #4 목소리로 기억하는 역사

구술사(口述史, oral history).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는 마술사의 일종인가 했다. 마술사, 주술사, 요술사, 그리고 구술사. 짜잔?!


나의 배우자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구술사의 연구방법을 활용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외할아버지의 생애를 녹취하러 간다고 했을 때 매우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구술사란 말 그대로 개인이 경험한 역사를 '입으로 말하도록' 해서 그걸 사료로 삼아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이 기억하고 있는 역사라니, 그 얼마나 세상에서 유일한 역사의 기록이란 말인가!


일반적으로 '역사'란 결국 권력자, 승리자의 입장과 목소리로 기록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기록된 역사가 교과서, 인터넷, 언론, 박물관 등을 통해 반복해서 확대 재생산된다. 구술사란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주류 역사에 대항하고 다양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대중들이 책과 영화 등 매체를 통해 재현된 주류 역사를 반복해서 접하면서 자신들의 기억이라고 인식하게 되는데 이러한 대중 기억(popular memory)에 대항하기 위한 대항 기억(counter memory)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구술사도 결국 푸코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취지의 이야기라고 이해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찾는 것이다. 교과서, 영화, 책, 인터넷, 박물관 그 어디에도 없는 역사,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진짜로 그 시대를 살아온 개인들의 기억 속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생생한 역사 말이다.


당신의 할머니는 어떤 삶을 사셨나요?


하지만 꼭 푸코의 카운터 펀치, 아니 카운터 메모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역사를 가까운 누군가가 기억한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이다.


연구 당시 나의 배우자는 외할아버지의 일생을 유년시절부터 하나하나 물어가며 녹취했다.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라 녹취한 내용을 정리하는 데에만 무척 오랜 기간이 걸렸다. 보통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처음 들은 얘기도 많았지만 배우자는 그 과정에서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외할아버지가 직접 자기의 목소리로 들려준 이야기는 부모님, 외삼촌들이 외할아버지에 대해 얘기해준 기억들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까운 가족들조차 바로 다음 세대에서는 윗세대의 이야기를 자신의 시각으로 단편적으로 왜곡/편집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후대의 역사가들이 경험하지도 않은 역사를 다룰 때에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배우자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외할아버지가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배우자를 보며, 나에게도 유일하게 남아 계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나는 나의 외할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나를 사랑해준 기억,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기억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지만, 그 분이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에는 어떻게 사셨고, 한국전쟁은 어떻게 이겨내셨고, 이후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아는 외할머니가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이 우주에서 동시대의 일부를 함께 살아가며 나를 사랑해준 외할머니의 이야기 정도는 내가 들어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참을 못 뵈었지만 이 시기가 무사히 끝나고 찾아뵐 날을 기약하며.




그리고 하나 더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 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다음 세대의 역사가들이 나 같은 사람을 역사책에 써줄 생각은 1도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아마 이 브런치에서 내가 쓰는 글들은 ‘나’라는 존재를 조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괘씸한 미래의 주류 역사가들에게 투쟁하는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곧 나의 구술사, 아니 기술사(記述史)인 셈이다.


그럼 오늘도 자신이 이 우주에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인터넷에 열심히 남기고 있을 모든 유일하고 소중하고 역사책에 남지 않을 당신들을 응원하며!


"나 지금 여기 있어!" (출처 : 스즈미야 하루히,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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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각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습니다. 찾은 답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행위조차 의심합니다. 질문과 의심, 호기심과 자유로운 생각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으로 날게 해줄 거라 믿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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