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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보라 Mar 02. 2020

왜 나는 why를 쓰고 있는가?

내가 질문을 던지는 이유

왜 나는 why를 쓰고 있는가?    

왜 why노트를 6년째 쓰고 있을까?

왜 why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확신하는가?

왜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사람은 why를 많이 할까?

왜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알려고 할까?

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남겼을까?

왜 나를 아는 것은 어려울까?

왜 나를 알면 타인과의  관계가 부드러워질까?

왜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대화가 필요할까?

왜 대화에는 질문하기가 필요할까?

왜 대화에는 경청이 필요할까?

왜 질문하고 잘 듣는 것이 잘 되면 사람과 친해지기 수월할까?

왜 사람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과 만나고 싶을까?

왜 자신의 존재에 집중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또 만나고 싶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두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성장의 기회다. 공감받고, 사랑받은 것들은 빛이 난다. 사람도, 식물도, 동물도, 심지어 물건까지도! 어떻게 하면 빛이 나는 걸까? 그들은 왜 빛나는 존재가 된 것일까?    

나는 유독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따뜻한 사람들이 궁금했다. ‘그들은 왜 다를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비교가 따라왔다. ‘왜 나는 부정적이지?’, ‘왜 나는 잘하는 것이 없지?’하며 부정적인 눈으로 나를 마주한다.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부정적인 시간이 내가 아는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부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나’를 싫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왜 부정적으로 나를 보면 안 될까?

이 why가 나오기 전까지 ‘부정적인 것’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말도, 부정적인 생각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why를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왜 아이는 울까?    

왜 엄마는 아이에게 울지 말라고 할까?

왜 울지 말라고 해도 아이는 계속 울까?

왜 울고 떼쓰는 아이에게 나쁘다고 할까?

왜 말을 잘 듣는 아이에게는 착하다고 할까?

왜 엄마의 관점으로 아이를 해석할까?    

왜 아이는 울면서 자기의 의지를 표현할까?

왜 끝까지 울면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위해 분투하는 것일까?

왜 아이의 관점에서 운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한 의지를 내보이는 것일까?

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필요할까?

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이에게 응원해줘야 할까?

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애쓰는 아이를 선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아이는 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처음 태어나서 아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울음이다. 울음은 곧, 생존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한 배고픔과 불편함을 표현해야만 한다. 그래서 울음은 생존의 수단이 된다. 아기들이 크면서 언어라는 것을 배워도 역시 울음은 생존이다. 울어야 개운해지고, 울어야 살 수 있다. 인간이 생존함에 있어서 긍정만 가득하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부정적인 감정, 표현, 특히 울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계속해서 why를 쓴 이유다. 내가 가진 고정적이고 단편적인 생각들을 이리 굴려 보고, 저리 굴려 보면서 세상을 조금 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관점을 가지데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6년 전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야.’라는 나를 향한 관점이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why는 계속되었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살아가게 된다. ‘전보라’ 내 이름은 사라지고, 누군가의 ‘엄마’로, ‘며느리’로, ‘아내’로 살게 된다. 나를 잃어가면서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도 잃어간다는 것조차 인식할 수 없는 시간이 온다. 아기를 낳고 산후우울증이 오는 이유일 것이다. 최소한의 수면, 식사,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제약이 따른다. 계속 울어대는 아기와 함께 울면서 아기를 키운다. 아무도 엄마에게 ‘괜찮아?’, ‘마음은 어때?’, ‘뭐가 제일 힘들었어?’, ‘오늘 하루 중 기분 좋은 일은 뭐였어?’하며 묻지 않는다.    

 

그때 필요한 것이 관심이다. 나에 대한 관심,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관심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는 것, 내 삶에 던지는 질문들을 매일 5개씩 모은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내가 나에게 집중해주고,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를 돌아보고 성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딸들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돕고 싶었다. 내가 계속 why를 하는 이유다.     


why는 관심이다.

why는 나를 찾는 도구다.

why는 관계를 매끄럽게 하는 마법 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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