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라영 Jul 30. 2021

어느 섬 여행기

혼자 다니는 것의 즐거움


1.

'한 여름에도 여름이 더 좋다고 말하는 용기는 가소롭다' 

라고 태양은 생각하는 듯했다. 이것은 몇 년 전 아주 더운 여름 혼자 섬을 여행했던 이야기이다. 처음 시작하는 문장을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만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 마르고 불타는 듯한 날씨를 첫 문장으로 담았다. 때는 8월 중순의 연휴 기간, 그곳은 서울에서 출발하면 하루가 걸리는 먼 곳이었다. 당시 나는 혼자 도망갈 곳을 찾다가 사진 몇 장 보고는 그만 홀딱 반해버려서 2박이었나 3박이었으나 숙소만 예약하고 바로 떠나버렸다. 애초에 묵을만한 곳도 몇 군데 없었지만 그나마도 이미 만실이어서, 주인이 자기 집 다락방을 써도 괜찮겠냐고 하였다. 황당하기는 했지만 거기 말고는 묵을 곳도 없었고, 같이 지내면 저녁밥은 같이 먹자고 하길래 돈을 아낄 수 있겠다 싶어 알겠다고 했다. 



 섬으로 가는 길은 단어 그대로,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내 인생 최초로 나홀로 여행을 시작한 것이기에, 솔직히 그렇게 먼 길을 가는 나 자신이 미친 듯이 자랑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만, 그때는 그랬다. 처음이니까. 그런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 바다를 내려다보면 되돌아갈 길 없는 짙은 물은 마치 내 불안감 같았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것들은 하얗게 부서지고 흩어졌다. 그 하얀 조각들 때문인지 어느새 나의 마음은 배 위에서 같이 날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오후여서, 다락에 짐만 풀고 바로 뒷산으로 올라갔다. 무시무시하던 태양도 기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 다녀올만했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오솔길과 낮은 경사로 산책이나 다름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쌓아놓은 듯한 돌탑과 오솔길과 들꽃들을 햇빛이 얇게 비추는 것을 보며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날 밤에는 별똥별을 보러 갔지만 가로등과 그날따라 달빛이 너무 밝아 볼 수가 없었다. 낮동안 데워진 따뜻한 돌바닥에 앉아 M자 모양의 별자리를 맞추고 다른 밝은 별들을 찾아보는 동안에도,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뒤섞이는 동안에도 뉴스에서 떠들던 유성쇼는 없었다. 강아지는 신이 나서 돌아다니고 우리는 허탕을 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2.

 지갑을 두고 나온 덕에 택시로 숙소를 들렀다가 코스 어딘가에 멈추어 걷기를 시작하였다. 아직 오전인데 햇볕이 드세다. 이것이 남도의 섬에 내리쬐는 축복인가. 가진 것 없는 도보 여행자에게는 고통이다. 조금 걷다 마을 어귀의 정자 아래 평상에 누웠다. 이 더위에 지친 불쌍한 사람을 쫓아내지는 않겠지. 앞집 할아버지가 런닝을 입고 담배를 물고는 그늘 아래로 온다. 안녕하세요 라고 하면 어디서 오셨는가. 여기는 외부에서 온 사람이 여행하러 가끔 온다고 하니 출신지를 꼭 물어본다. 나는 서울이라고 했고, 할아버지는 조용히 담배를 태우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 무언의 연기가 일종의 허락같이 느껴져서, 나는 이십 여분 가량 평상에 누워 선잠을 잔다. 경운기 소리나 풀벌레 소리가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맴돈다. 그늘 아래에 부는 바람은 땀을 흘렸기 때문인지 선선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작은 보상을 받는 것만 같다.



 잠을 깨고 나니 머쓱한 기분에 빨리 떠나야겠지만, 남은 길이 녹록지 않기에 물 한 모금이라도 얻어먹지 못하면 자리를 뜨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번에는 할머니 한 분이 나와 공용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가려고 한다. 염치도 없지만 돈 드는 것도 아니니 물 한 모금만 주시면 안 되나요 하고 물었다. 어차피 다시 보기도 어려울 것이고 그런 염치없음이 혼자 다니는 도보 여행자의 속성이라도 되는 듯. 할머니는 아예 와서 밥 먹고 가라며 마을회관으로 가자고 하신다. 식당도 몇 군데 없는데서 점심 한 끼니 해결하는 것도 큰 일이었기 때문에 염치 불고 뒤를 따른다.


 마을에서 모임이라도 하는 듯 여러 사람이 모여 밥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하고 있었다.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는 아주머니들이 자꾸 밥을 먹으라고 하는데 사양하다 보니 떡과 과일이 손에 들어왔다. 물이랑 좀 먹다가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나올 때 포도와 하얀 절편을 한 봉지 씩 쥐어주신다. 시골 인심도 옛말이라고 하던데, 무엇때문에 음식을 이토록 계속 주시는지... 배를 대충 채우고 그 뙈약볕을 걸어가며 미지근하고 달짝지근한 포도를 먹는 길에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사람은 역시 못 먹으면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급하다 보니 별의별 경험을 다하네. 왜 그 섬 여행을 그토록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은 풍경도 있지만, 낯선 이에게 받았던 기대하지 못한 환대에 대한 기억도 한 몫하는 것 같다. 



3. 

 요즘 트레킹을 간다면 단지 그것만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할 것이다. 날씨는 좋은지, 신발은 적합한지, 혼자 다녀도 괜찮을지, 만약 날씨가 좋다면 너무 덥지는 않을지, 더워도 다닐만하다면 물을 챙기거나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여러 가지 생각들은 모두 미뤄두고, 500ml 생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작은 가방만을 챙기고는 그냥 걸었다. 뭐든 자세히 알아본 것이 없었으니, 그 길이 얼마나 먼지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알고자 하지 않은 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때는 8월 중순, 걷기를 시작한 때부터 이미 땀은 흘러내리고 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내가 그날에 대해 남아있는 강렬한 기억들이 몇 가지 있는데, 멋진 풍경과 더위로 인한 괴로움과 마침내 해탈이다. 걷다 보니 길에는 아무도 없고 태양은 내리쬐고, 손에 물 한 모금 쥐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게 미친 짓이구나 싶었을 때는 이미 꽤 많은 길을 걸어온 후였다. 잠깐 어지럼증을 느껴서 멈춰서 쉬기도 여러 번. 그러나 곳곳에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바닷바람이 한 번씩 불어오면 힘들다는 생각이 싹 가셨다. 물론 다시 태양 아래를 걸으면 그 생각은 다시 밀려온다. 파도의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여기를 동네 마실 나가듯 오다니, 한 번씩 실소가 터진다. 



 중간에 코스를 잠깐 벗어나 바닷가로 내려갈 수 있었는데, 그곳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보이는 바다 위에도 아무것도 없다.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지쳐있던 심신이 고요하게 가라앉는 기분이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서 먼 길을 떠나온 것일까? 그때는 분명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행복했다.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즐거운 소란스러움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비로소 조금이나마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파도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그 조용하지 않은 정적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짙은 푸르름에 나는 잠깐 두려움을 느낀다. 멀리서 보면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가, 발끝까지 밀려올 때 나는 두렵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들은 한 번씩 나의 일상을 침범한다. 그곳은 아름다웠지만, 장소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그 풍경을 즐기고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알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그리운 것일 것이다. 아니면 그 홀로 떠난 여행 특유의 즉흥성과 예측 불가함에 마음을 뺏긴 것일까?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의 괴로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이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런 여행을 통해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본 글에서는 직접 찍은 사진만 사용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차의 무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