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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영 Oct 27. 2021

흐르는 강물처럼

가을이 왔다


 불현듯 가을이 찾아왔다. 나가기 전 날씨를 확인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날씨도 아니었지만, 당일 아침 훌쩍 떠나온 여행자에게 다른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우산도 겉옷도 챙기다 보니 짐이 늘었다. 그렇게 치렁치렁 매단 채로 하루를 다녀야 한다니 아찔하다. 나의 운을 믿으며 우산을 제자리에 놓아두고 필요할 수도 있는 것들은 제외하고, 꼭 필요한 것만 챙긴 채 보다 가벼이 숙소를 나섰다. 나는 이렇게 연례행사를 한다. 사람들이 산으로, 산으로 단풍놀이를 가는 계절의 이맘때쯤 즉흥적으로 떠나는 그 어떤 고행길. 


 삼십 분을 채 달리지도 않았는데 비가 쏟아졌다. 10월 초 흐린 날씨에 비까지 더하니 아주 금상첨화다. 지나쳤던 카페로 급히 되돌아가며, 나는 숙소에 두고 나온 우산과 겉옷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금 내게 있다고 한들, 빗속을 뚫고 달릴 만큼 나에게 강력한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나는 불가능했다. 굳이 말로 표현하는 순간 많은 것이 퇴색되는 것처럼. 커피가 담긴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들로 어차피 사라질 무늬를 하릴없이 그려 넣는다. 작은 탁자에는 컵 표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가게에서 내어준 코스터가 무색해졌다. 분명 아침 뉴스에서는 일교차가 크니 외출 시 겉옷을 챙겨 감기를 조심하라고 했고, 일부 지방에 간헐적인 비가 올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뉴스를 보고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은 나의 운에 대한 오만인지, 홀가분함에 대한 열망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모든 것은 어느 가을 즈음 나이가 멈춰버린 한 친구가 섬진강 자전거길을 달리고 싶다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와닿는 어떤 주제에 관해서 만큼은 유별난 수다쟁이였다. 함께 술을 마시던 어느 날, 자신이 가보지도 않은 섬진강 길에 대해 그는 삼십 분 넘게 얘기를 했다. 사진 몇 장을 같이 보며, 어쩐지 나는 조금 심심해 보이는 길이라고 얘기했고, 그는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힌 것들이 많아, 그 심심한 물에 하나둘 던져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쯤 나의 엉킨 생각들을 풀어내기 위하여 오히려 일상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틈을 준다면, 그것들은 그 틈을 기어코 비집고 들어와 일상을 아작내버릴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틈을 만들고 그 속에서 강물을 따라 자전거나 타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비현실적이라 우리는 잘 맞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누군가의 길을 대신 달리고 있는 이유를 나는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아주 약한 의무감과 조금은 강한 감상에 젖어 연례행사를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제는 나도 이 심심함에 조금은 정이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를 다 마실 꼭 그때 비가 그쳤고 나의 작은 행사는 재개된다. 길게 페달을 밟으면 자전거는 강하게 그리고 천천히 나아간다. 꼭 섬진강 물줄기 같다. 강은 오랜 시간 전부터 끊임없이 흘러왔고 그 줄기에 감겨 흐르는 물은 방금 흘러간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다. 한번 흘러간 그 물은 되돌아 흐르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 물줄기를 따라 달리는 이들은 되돌아와 다시 그 길을 달린다. 

겉옷을 훌훌 털어버리며, 상념을 툭툭 끊어내며.






  Photo by Nazar Sharafutdinov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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