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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영 Oct 28. 2021

기차 여행자, OO

백년보다 긴 하루

땡땡은 사람의 이름이다. 

땡땡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땡땡은 기차를 타고 끝없이 여행한다. 


 여기서 "끝없이"라 함은, 공식적으로 기차의 힘이 미치는 구역 내에서만 이동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땡땡은 대부분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그가 기차에서 내리더라도 다만 기차역 내의 편의시설만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그는 여느 여행자처럼 기차를 타고난 후, 내려서 여행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기차 그 자체가 여행지이다. 

 

 땡땡의 하루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그는 불편한 침대에서 잠을 깨 커튼을 열어젖히고 오늘 날씨를 확인한다. 그리고 날씨와 주변 풍경과 오늘 지나게 될 역 등을 메모한다. 간단한 정리 후 그는 식당칸으로 이동해서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그 후 멈추는 첫 번째 역에서 내려 1분간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나머지 하루를 보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창작의 활동이라기보다는 기록에 불과하다. 땡땡에게 기록이라는 것은 DNA에 새겨진 습성 같은 것으로, 그가 정신이 있는 상태에서 당도하는 모든 역에 대해서 기록한다. 역사의 사진을 찍고, 그 역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각종 음식과 신문가판대 등의 내용을 쓴다. 그 역사 내의 독특한 무언가가 있다면 추가로 덧붙이기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비슷한 풍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 아침 땡땡은 잠깐 내려서 사진을 찍고 만두는 파는 아주머니에게 만두 한 봉지와 아이스크림을 샀다. 가판대에서 톨스토이 책을 사고 기차로 돌아왔다. 그러면 그 역은 땡땡에게 만두, 아이스크림, 톨스토이 역이 된다. 어제 잠들기 전에 내렸던 곳은 커피, 노숙자 역이었고, 그저께 아침은 비둘기 다섯 마리의 역이었다. 땡땡은 커피, 노숙자 역을 몇 번이나 거쳐왔기 때문에, 이제 그는 역사 계단에 힘없이 누워있는 이를 보기만 하면 그곳에서는 커피를 사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은 한여름이지만 땡땡은 눈보라 내리는 역을 생각하고 있다. 춥고 맑은 날, 그 전 역에서는 날씨가 화창했는데 다음 역으로 가는 삼십 분 사이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때는 심지어 한겨울도 아니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애타게 봄을 기다리던 시기였으므로, 그 눈발이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그런 때가 기차 여행의 수준이 한껏 올라가는 순간이다. 투명하고 넓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산과 끝없는 눈발. 그는 아늑한 침대에 앉아 발을 담요로 덮어두고 마치 영화를 보듯 그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았었다. 문학소녀, 소년들은 그런 풍경에 감동받아, 일기를 쓰거나 시를 쓰거나 할 것이다. 어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치 가와바타의 `설국`과 같다며,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첫 문장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최대한 예쁘게 써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땡땡은, 노트를 펼치고 `눈보라 내리는 역`이라고 써놓고는 다시 노트를 덮었다. 커피가 조금씩 식어가며 다음 역에 도착하기 전에 눈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는 곧 봄이 찾아왔다. 


 땡땡의 짐은 가방 하나로 모두 정리되어야만 한다. 아니, 모든 여행자는 반드시 가방 하나로 여행지에서의 일상을 책임질 수 있어야만 한다. 땡땡의 가방에 든 물건은 다음과 같다. 3일 분량의 옷과 간단한 세면도구, 책 몇 권, 다섯 권의 노트, 두 자루의 볼펜, 카메라…. 그는 책을 사고 난 후 다 읽으면, 기차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줘버린다. 노트는 어느 정도 분량이 쌓이면 기차역 내의 특송 서비스로 오랜 친구에게 보낸다. 친구는 아무 대가 없이 그 노트를 모두 받아서 보관해주고 있다.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땡땡의 `끝없는 기차여행`에 깜짝 놀란다. 그리고 두세 번 정도, 정말 계속 기차를 타고 이동만 하시는 건가요?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으세요? 지금 며칠이나 되신 거죠? 와 같은 질문들을 퍼부은 후에는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는 그 모든 절차에 대해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으며, 어떤 질문에도 정해진 답을 빠르게 골라내 놓을 수 있다. 며칠 전 유리 조각, 술주정뱅이 역에서 - 그곳은 당연히 유쾌한 역은 아니었다 -  환승을 위해 하나의 배낭을 멘 채 이동하고 있는 땡땡은 어떤 젊은 남자를 만났다. 그에게 다 읽은 책을 보여주며 갖겠냐고 물어보았는데, 그러면서 그와 대화하게 된 것이다. 그는 대화를 마칠 때쯤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며, 저도 다 읽은 책을 드릴게요 라고 말했다. 사실 땡땡은 대부분 역 내의 작은 가판대에서 책을 샀기 때문에, 대부분 아주 유명한 고전들로, 그 역시 이미 아는 내용의 책들이었다. 가판대에서 파는 책들의 종류는 어느 역이든 상당히 비슷하기도 했다. 상대방이 주는 낯선 책을 받으며, 난생처음 있는 일에 대해 당황하고 있는 그에게 청년이 말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작은 간이역에서 일하는 철도 노동자인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선생님이랑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는 그날 밤 침대를 정리하고 유리 조각, 술주정뱅이 역에서 사 온 음료를 마시며 그 책을 펼친다. 책은 `여기서 기차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라는 문장을 반복한다. 나이 든 철도 노동자의 친구는 죽었다. 그는 친구의 장례를 준비한다. 땡땡은 조금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명확하지 않은 어떤 상징들에 대해서 노트에 쓴다. 암여우, 친구의 죽음, 우주 로켓, 외계인, 만꾸르뜨...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도 노트에 쓴다. `그러나 눈은 녹았고 기차들은 지나갔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나 삶이란 믿을 수 없는 농담이었다.`. 땡땡은 주인공이 기차여행을 하며 괴로움에 눈물을 흘릴 때, 자신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그는 노트를 가득 채워 갔으며, 밤은 사각사각 깊어졌고, 책장은 천천히 넘어갔다. 아침이 올 때쯤에 땡땡은 그의 잃어버린 이름에 대해서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Photo by Gantumur Delgerdala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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