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는 수심 몇 킬로미터의 깜깜한 바닷속을 혼자 걸어 다니는 상상을 한다. 가끔 심해어의 몸짓을 담은 잔물결을 실어 보내는 것이 전부인 그런 깊은 바닷속을. 빛조차 모두 삼켜버리는 그곳에서는 걷는 것 자체가 큰 행위이다. 엄청난 수압을 견뎌내야 하는 몸덩어리가 곧 짐이다. 저 멀리서 반짝이는 것이 나를 구원해 줄 빛인가, 아니면 나를 삼키기 기를 기다리는 어류의 눈인가.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는 혼자 뗏목에 누워서 망망대해를 떠도는 상상을 한다. 파이처럼 맞서야 할 맹수조차도 없는, 삶의 의미라고는 오롯이 스스로 깨달야 하는 그런 곳.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해초처럼 떠도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공포다. 차라리 나를 잡아먹을 거대 어류의 출현을 바라게 된다. 죽음이 쫓아오면 피하려고 하지만, 기다리고 있을 땐 다가가고 싶어 진다. 물이나 먹을 것에 대한 욕망조차도 사그라진 그 순간에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생각조차 하지 못하면 눈앞에 보이는 망상은 어떤 것일까? 멀리서 그를 구원해 줄 고래가 몰고 오는 파도가 느껴진다. 이쯤 되면 그는 한 가지 질문에 가닿는다.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