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의 관찰
이상, 밀란 쿤데라, 김승옥을 통해서 본 소설에서의 관찰.
관찰이라는 거의 항상 중요하다.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칭찬에 가깝다. 초등학교 과학시간에도 중요했고, 고등학생 때 어떤 친구들과 어울릴지를 결정하는 것에도 중요했으며, 사회생활에서 관찰력은 곧 눈치로 연결되어 사회성이 좋다는 것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당연히 사회 구조 안에서 관찰과 그에 따른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은 이상적인 모델로까지 느껴진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글을 읽다 보면 작가가 관찰력이 뛰어난지, 그게 어떤 소설적 재미로 이어지는지를 보는 것은 재미있다. 상상력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모든 글을 머릿속에서 창작해 낼 수 있는, 마치 SF의 거장들과 같은 이들도 있겠지만, 어쩐지 실생활에서 한 번쯤 경험해 본, 또는 경험이 가능할 것 같은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예를 들어, 이상의 <권태>라는 작품에서는 송사리에 관한 관찰이 그 짧은 글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만약 물에서 노는 송사리를 제재로 하여 글을 쓴다고 할 때, 많은 경우 송사리 떼를 자연을 묘사하는 풍경 중 하나로 사용할 것 같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작가가 정말 하릴없이 앉아서 송사리를 관찰하는 내용을 그린다. 자신은 그렇지 않은데, 보잘것없는 송사리 떼가 바쁘게 이동하는 것을 보고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친구와 청계천을 걸을 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도 작가처럼 유난히 작은 물고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관찰하였는데, 그때 우리는 신기하게도 물고기들이 물을 타고 노는 것처럼 보였다. 물이 흐르는 역방향으로 가만히 힘을 주고 서있다가 힘을 살짝 풀어도 보고 그러면 물에 쓸려 얼마간 떠내려간다. 그러다 다시 거슬러 올라서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물을 맞는다. 날씨 때문인지 기분 때문인지 물고기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놀이보다는 생존의 이유일 가능성이 크지만, 일상에 관찰이라는 것을 좀 더한다면, 미물의 움직임에서도 놀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좀 더 일상이 재미있어질지도 모른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역시 짧은 글이지만, 작가의 뛰어난 관찰력이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리에 대한 감상이 아주 인상적인데, 예를 들어 여름밤의 개구리 소리를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언젠가 여름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 조개껍질을 한꺼번에 맞비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그 개구리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여름밤, 시골에서 개구리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아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소리는 도저히 아름다운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그것을 소음이 아니라 수많은 비단 조개껍질을 비비는 소리 같다고 하니,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또, 그 소리와 여름밤의 은하수는 글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마치 개구리 소리와 은하수를 배경으로 하는 시골 할머니 집의 평상에 앉아서 벌레를 내쫓으며 옥수수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경험해보지 않고는 이런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반면, 같은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은 비유적 표현보다는, 대놓고 관찰한 내용을 읊어댄다.
“평화 시장 앞에서 줄지어 선 가로등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좀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보자 더욱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 그리고 화신 백화점 육 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관찰은 단순히 관찰이다. 그런데 그 특이점은 그 관찰을 아마도 나만 했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있다. 즉, 관찰한 내용이 관찰자 고유의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관찰은 <무진기행>처럼 시적 표현이 아닌, 오히려 굉장히 현실적인 느낌이다.
다른 나라의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밀란쿤데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논의되는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 특유의 관찰력에 감탄하고는 한다. <무의미의 축제>를 보면 책의 등장인물들은 충분히 과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살아있는 사람들 같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는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검사를 받게 되는데, 검사 결과 음성이라는 얘기를 듣고 매우 기뻐한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옛 직장동료에게 슬픔에 잠긴 눈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암에 걸렸다고 얘기를 하게 된다. 이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이는 절대로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하면 그냥 상황상 그렇게 돼버린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나를 암에 걸려도 담담히 이겨내는 멋있는 사는 사람처럼 봐주겠지 이 정도 느낌일까? 그런데 꼭 거짓으로 병명을 지어내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런 느낌의 사람들은 현실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남자는 아주 예쁜 여자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도 실제로는 아무 사이가 아니면서 어떤 부정도 하지 않고 웃으며 넘어간다. 작가는 디테일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의 성격에 대해서 직접 서술하기보다는 그냥 우리가 보고 느끼게 한다. 나는 책을 보면서 실제로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있지, 라거나 내가 비슷한 상황에서 행동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다른 인물들도 이런 식으로 상황을 통해 인물의 성격이 드러나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보면서 공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나는 이렇게 밀도 높은 관찰력을 가지고 글을 쓰는 작가들을 좋아한다... 플로베르가 방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관찰력이라 생각하는데, 전반적인 배경과 분위기를 풀어낸다고 하기보다는, 일부분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느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송사리 떼를 보고 흘러가는 감정을 잡아서 글로 쓰고, 얼핏 스쳐 지나갈 인간 군상에 대해서 좀 더 분석하는 그런 글... 그리고 나 역시, 글을 쓰는 것을 떠나서 이런 관찰력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1년 11월에 쓴 글을 옮겨둔다.
사진: Unsplash의Gilbert 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