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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영 Dec 16. 2023

어느 밤에 책을 읽으며 문득 느꼈다.

<백년보다 긴 하루> 감상문

어느 밤 책을 읽으며 문득 어떤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나는 ‘객관적인 애착의 감정’이라 부르고 싶다. 애착의 감정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뜻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이 단어 선택이 이상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그런 느낌이라고 떠올라서 쓰는 것뿐이다.


이런 느낌을 들게 한 것은 '백 년보다 긴 하루'라는 책이다. 최근 부모님 댁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아침 일찍 깨서 하릴없이 누워 있을 때 옆에 있는 책장에서 이 낡은 책을 보았다. 그 주에 다른 생산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난 김에 좀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그 의미 있는 일이란 누워서 그 오래된 책들을 하나씩 검색해 보는 것이었다. 마치 누가 책을 여러 권 추천해 줘서 그것 중에서 무엇을 살지 고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 방은 볕이 잘 들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오래된 책들은 몇 년 사이 더 색이 바래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그것을 빼서 직접 읽을 생각은 하지 않고, 찾아보고 괜찮은 책이면 전자책으로 구매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오래되고 낡은 물건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80년대쯤 사람들이 많이 읽었던 책들이 아닐까 했다. 작가들의 이름은 익숙하고, 몇몇은 이미 아는 책이다. 그러나 그중 절반은 절판되어 구매할 수가 없었다. 그중 내 마음에도 어느 정도 들고, 최근 몇 년 전에 개정판도 나왔으며, 전자책으로도 살 수 있었던 책이 바로 '백 년보다 긴 하루'였다. 나는 뭔가 이런 책이 좋다. 그 배경이 나에게 생소한 것, 내가 겪어보지 않는 문화와 풍경이 있는 것, 너무 다른 환경이지만 정서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는 것... 소설의 경우,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의 책은 좀처럼 읽지 않는 나의 독서 취향을 고려해 보면 나는 이런 이색적인 경험에 무척 끌리는 것 같다. 내 꿈은 작가는 아니지만, 만약 죽기 전에 책을 한 권이라도 쓰게 된다면, 내 가까운 사람들보다는 어디 멀리서 사는, 살면서 도저히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이 내 책을 좋아해 준다면 나는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고인의 집 앞마당에서 저녁과 밤 시간을 같이 보냈다. 다행히도 날씨는 사납지 않았다. 낮 동안의 더위가 가시자 사막의 싸늘한 초가을 냉기가 내려앉았고 거대한 황혼이 가라앉은 온 주위에 고요가 내렸다. 밤샘에 쓰려고 잡은 새끼 양에 칠 양념이 어둠 속에서도 벌써 다 만들어졌고 더운 김을 뿜는 사모바르 옆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는 온갖 화제들 주위를 맴돌았다. 이제 장례식 준비는 끝났고 남은 일은 아나-베이뜨로 떠날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시간은 조용히, 평화롭게 흘러갔다. 아주 나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슬퍼하기가 괴로울 때면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이 소설의 장소적 배경은 카자흐스탄인 듯하며,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스텝 지대이다. 사막으로 둘러싸인 짧은 풀들이 있는 초원지대. 시대적 배경은 주인공이 젊었을 때가 50년대를 흘러가고 있으니 구소련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 나에게는 얼마나 생소한지! 게다가 사람들은 기차역에서 근무하면서도 평소에는 낙타를 타고 다닌다. 장례를 지낼 때도 트랙터와 함께 낙타를 타고 다닌다. 물건을 싣거나, 아이를 보러 갈 때도 그들은 낙타를 탄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다. 이 소설은 이상하고 아름답다. 제대로 근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부족한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와 저 이야기가 왜 같은 소설 안에서 쓰였는지 고민되는 부분도 많다. 일부러 내가 좋아하는 낯설게 하기 기법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혼란스럽게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느꼈다. 내가 주인공 예지게이에게 객관적인 애착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고, 내가 아는 이에게 공감하는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한 감정으로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행위도 방해받지 않지만 그 책을 펼치기만 하면, 감정적으로 그에 동요되는 것이다. 그냥 이것을 객관적 애착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대체로 좋은 사람에 가깝지만 어떨 때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객관적 애착의 감정이 없다면 그를 비난하면서 책을 덮어버리고 더 읽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이 애착관계에서 우리는, 그가 비록 실재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그가 때로는 자로 그은 듯 명확한 도덕관념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한 번씩 비틀거리더라도 그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아마도 실재하는 인간들의 마음에 그처럼 깊숙이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은 소설 속에서는 그 사람의 감정 변화를 저자가 자세히 기술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해할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어떻게 특정 감정에 젖어들어가는지의 과정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공감과 이해의 형태는 얼핏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부분에서는 내 마음도 어느 정도 아릿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사랑을 잃었던 때나, 또는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사랑을 잃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 과는 좀 다르다. 그것은 파도가 밀려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때로는 시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때로는 내 발을 적시지만 않으면 아무 상관없는 그런 것과 같다. 노동하던 개미가 무언가에 밟힌 채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과 내 친밀한 이들의 아픔을 보는 그 사이의 느낌과 같다.


나는 그의 눈을 통해 그들이 속한 사회를 보고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스텝 지대의 건조한 땅을 밟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낙타 위를 타고, 50년대에서 60년대로 흐르는 그 시대의 고통을 느낀다. 그가 가상의 인물이든, 과거에 죽은 사람이든, 우리가 가진 공통점은 매우 적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그러나 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 사이의 작은 다리를 만들어주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은 즐겁다.






사진: UnsplashGiovanni Pellizz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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