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ndsbird Jul 05. 2024

영국은 휴 그랜트의 나라가 아니었다

영국에 온 첫날부터 깨달았던 제일 충격적인 사실은 영국은 휴 그랜트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에 있던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실제로 외국인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초등학교 방과 후 학교에 조금 늦게 남아 있었던 어느 날, 텅 빈 복도를 걸어가다 교실에 앉아 있는 외국인을 보고는 허걱 놀랐던 기억이 있다. 금색 빛나는 머리에 뽀얀 우윳빛 피부. 이 시간에 우리나라에서,  바로 우리 학교 교실에 외국인이 앉아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 몰래 숨어서 흘낏흘낏 그 외국인을 훔쳐보았었다. 그러곤 집에 들어가 엄마에게 나 외국인 봤다며 자랑을 늘어놨었다. 


물론 황인종이 아닌 다른 인종을 접해보긴 했었다. 매주 비디오방에서 빌려보던 영화 속에서 외국인을 참으로 실컷 봤었다. 


미국 영화가 주류였던 그 시절에 내가 아는 영국 배우라곤 휴 그랜트밖에 없었다. 엄만 휴 그랜트가 주연이었던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Sense and Sensibility'와 긴 제목이 인상적인 '언덕을 올랐다 산을 내려온 영국 사나이(The Englishman Who Went Up a Hill But Came Down a Mountain)'를 아주 좋아하셨고 그 덕분에 알게 된 배우다. 서글서글한 훈남형 외모와 장난기 머금은 매력적인 미소는 어린 소녀였던 내 눈에도 참 멋져 보였다. 


그땐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의 다른 억양을 구분할 수 없었다. 영어란 단순히 내게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일 뿐이었다. 이런 단순한 논리로, 내겐 '외국인=영화배우'란 심플한 공식이 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에서 접한 모든 외국인들은 하나 같이 잘생기고 아름다운 백인들이었으니 영국에 가면 만나는 모든 백인들도 그렇게 생긴 줄 알았다. 


영국에 깜깜한 밤에 도착해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2층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바깥을 구경할 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 케이트 윈슬렛들이 걸어 다닐 줄 알았던 동네 거리는 그냥 아주 평범한 외모의 사람들 뿐이었다. 눈코입 균형이 맞지 않는 사람, 땅딸막한 사람, 주름이 자글자글 한 사람, 뚱뚱한 사람... 휴 그랜트 외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영국은 휴 그랜트의 나라가 아니었다. 


#이민생활 #영국생활 #추억




이전 04화 탕수육 대신 자켓포테이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