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도 제대로 마지치 않은 채 영국에 왔으니 영어가 유창할리가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 꾸준히 받았던 영어 과외 산물, "헬로 하우아유. 아임파인 땡큐. 앤유? 아임어걸 유아어보이" 정도야 꽤고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 가족이 영국으로 갈 날을 기다리는 기간 중, 어느 날 학교 운동장 흙바닥에 내가 아는 영어 단어를 손가락으로 써본 적이 있다. Apple, school, house, boy, girl, dog, cat.... 기본적인 단어 몇 개를 쓰고 나니 더 이상 쓸 말이 없어 글쓰기 놀이를 금방 포기한 기억이 있다.
영어로 학교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그런 '앞 날'까지 내다보기엔 내 나이는 너무 어렸다. 더군다나 행정적인 이유로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 달 정도를 집에서 놀았기 때문에 한동안은 영어를 못하는 게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장벽이 된다고 느끼지 않았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시간 날 때마자 동네 도서관으로 데리고 갔고, 우린 마음껏 보고 싶은 책을 빌려보았다. 그나마 쉬운 단어들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알록달록한 삽화가 가득한 유아용 동화책을 빌려오면 엄마가 매일 밤 우리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래서 그때 난 우리 엄마는 영어를 '무진장' 잘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엄마가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란 걸 훅하고 깨달았던 순간이 있었다.
학교 안 가고 집에서 놀던 기간 동안 나와 동생은 도서관에서 만들기 책을 빌려와 이것저것 따라 만들어 보는 걸 좋아했다. 하루는 반나절을 들여 손과 발이 움직이는 곰돌이 푸 모형을 만든 적이 있다. 골판지 박스에 50cm 되는 크기의 곰돌이 모형을 그려 가위로 오려내고 크레파스로 색칠을 해주었다. 박스지가 두꺼워 작은 손으로 둥그런 모형 따라 가위질을 한다는 건 꽤나 힘이 드는 일이었다. 만화에서 나오는 모습 그대로 강렬한 색을 입혀주고 싶어 곰돌이 몸통은 노란색, 티셔츠는 빨간색으로 빈틈없이 색칠해 주었더니 손목도 많이 아팠다. 팔과 다리는 일단 몸통과 분리되게 오려 색칠한 다음, 구멍을 뚫고 몸통에 두꺼운 실로 연결해 주었다. 팔다리와 몸통을 잇는 실을 핸들처럼 잡아당기면 팔다리가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런 구조의 장난감이었는데, 이 모든 걸 내 손으로 만든 게 참 뿌듯했다.
실로 만든 핸들이 잘 작동하는지 최종 확인을 하고, 마무리 작업으로 티셔츠에 영어문구를 넣을 생각이었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헬로우 영어 스펠링이 어떻게 돼요?"
"H.E.L.L.O.W"
검은색 크레파스로 굵직하게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 아주 정성스럽게.
몇 시간 뒤 아빠가 퇴근한 후 스펠링이 잘못됐다고 알려줬을 땐 얼마나 속상하던지. 반나절 손 시려가며 만든 나의 자랑스러운 곰돌이푸 티셔츠에 옥에 티처럼 쓰여있는 Hellow. 그날 저녁 내내 왜 그것도 제대로 못 알려 줬냐며 얼마나 엄마에게 짜증을 냈는지 모른다.
이 날 처음으로 우리 엄마도 영어를 못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는데, 어린 그때는 그게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