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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테이프의 추억

by Windsbird

영국에 도착해 우리 가족이 처음 정착한 지역은 해로우(Harrow)란 지역이였다. 유난히 인도 계열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이 곳은 템즈강 북쪽에 위치해 한인들 사이에선 장난스럽게 '강북'지역으로 불리곤 했었다. 구지 강북으로 불렀던 이유는 한인 타운인 뉴몰든이 템즈강 남쪽, 즉 '강남'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한국 슈퍼를 어디 가나 쉽게 찾아 볼 수 있지만 90년대 후반엔 어림도 없는 소리. 뉴몰든엔 대형 한국 슈퍼 '서울플라자'는 물론 한국 떡집(낙원떡집), 정육점, 중국집(징기스칸)도 있어 '강북'에 사는 한인들에겐 '강남' 뉴몰든 사는 사람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였다. 부모님들은 누군가 '강남'에 간다하면 그 집에 전화를 걸어 쌀포대, 고추장, 김 등을 사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강북' 지역이라고 해서 아예 한식 재료들을 접할 수 없었던 건 아니다. 조금 운전을 하고 나가면 룽풍(Lung Fung)이란 대형 중국 슈퍼가 있었고, '대원슈퍼'란 작은 한인 슈퍼도 있었다. 대원은 규모가 작긴 했지만 이국땅에서 한국밥을 차리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엄마 아빠가 대원에 가는 날엔 나도 꼭 따라가곤 했다. 내가 관심 있었던 것은 김도, 김치도 아니였다. 대원에서 엄마 아빠가 장을 보는 동안 내가 시간을 보냈던 곳은 대원슈퍼 뒤켠의 은밀한 코너였다. 높고 깊은 쇠 선반으로 파티션으로 되있는 이 곳은 슈퍼 단골만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슈퍼 뒤쪽에 숨겨져 있는 이 곳 선반엔 비디오 테이프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불법으로 녹화해온 인기 TV 프로그램들이다. 공식 비디오테이프가 아닌 녹화본이다 보니 테이프에 붙혀진 하얀 레이블 위엔 네임펜으로 프로그램 이름이 하나 하나 적혀있었다. 대원 슈퍼 덕분에 난 지오디의 '육아일기'를 챙겨 보며 손호영에 반했고, 청소년 드라마 '학교' 시즌 1,2,3을 보며 한국에서의 학교 생활에 대한 로망을 가졌다. 난 한국의 중·고등학교 생활을 절대 겪어보지 못할 거란 현실(?)이 얼마나 서럽든지.


당시 비디오 대여비는 테이프 하나당 1 파운드 였던걸로 기억한다. 대원에 갈때마다 우린 비디오 테이프 20-30개를 한꺼번에 빌려 온가족이 모여 밤새도록 정주행을 하고는 얼른 다른 집에 빌려주곤 했다. 이렇게 넘겨진 비디오 테이프들은 몇 가정을 거친 후에야 대원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아줌마들은 모일때마ek '모래시계', '가을동화', '겨울연가' 이야기를 우리 십대들은 '남자 셋 여자 셋', '순풍 산부인과'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윤계상이 더 잘 생겼다, 아니다 손호영이 잘 생겼다, 종종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의 그리움을 시원하게 달래준 대원 슈퍼 사장님은 요샌 뭐하고 사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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