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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나의 1988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부작용

by Windsbird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기 시작했다. 워낙 취향이 까다로와 드라마를 시작해도 꾸준히 보지 못하고 마음에 안들면 금세 다른 걸로 갈아타곤 하는데 '응답하라 1988'은 첫 회부터 내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다.


잔잔하고 따뜻한 이야기 속에 귀엽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고, 억지스럽지 않은 유머가 자연스럽게 아든 장면들이 어울려 잘 버무려진게, 60분이란 시간 동안 날 박장대소 시켰다가 그 다음 장면에선 내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드라마의 또 다른 묘미 배경이 된 80년 대 후반 소품들이다. 1,2,3번 버튼 중 골라 누르면 적정량의 쌀이 나오는 플라스틱 쌀통, 바지 밑단에 발뒤꿈치를 넣을 수 있는 고리바지, 옆집 친구집에 놀러가야만 볼 수 있었던 벽돌보다 두꺼운 보물섬 만화책. 지금은 보기 여려운 물건들이지만 어렸을땐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일상품을 드라마에서 다시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인공들이 밥을 먹다가 돌을 씹는 장면도, 엄마 없을때 몰래 흰밥에 마가린을 넣어 비벼 먹는 모습도,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지만 내겐 더 아련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이 추억들은 나만의 추억으로 끝날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한국을 떠나 영국에 산지 벌써 27년. 외국인 짝꿍을 만나면서 결혼 이야기, 2세 이야기가 점점 자주 우리 대화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내가 자라온 '한국'은 나의 남편이 될 사람에게도, 내가 낳게 될 아이들에게도 낯선 땅, 낮선 문화가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아무리 내가 집에서 열심히 된장국을 끓여주고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해도... 내가 입었던 런닝구, 연필깎이가 달려있던 사각형 필통, 개울에서 실컷 놀고 동네 슈퍼에서 수박바를 사먹던 기억들은 가족들이 절대 공감하지 못하는 나 혼자만의 것일테니까.


#이민자 #이방인 #외국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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