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서른에 죽는 게 꿈이었다. 나이 들면서 몸이 퇴행하기 시작하면 너무 서글플 것 같았다. 내 것이었던 건강과 젊음이 사라지는 때가 오기 전에 사라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조금은 암울하고 조금은 철없는 그런 생각을 십대 땐 자주 했었다.
오늘 아침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다가 문득 더 늘어난 흰머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2023년 보다 흰머리 개수가 많아졌다. 젠장. 들여다본다고 흰머리가 검은머리로 바뀌는 것도 아닌데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섹션별로 나눠가며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서른. 어릴 땐 나이 서른이란 숫자가 거대해 보였다. 이십대는 젊고 스타일리시한 멋진 연령대고, 삼십대는 후줄근한 중년이었다. 서른을 넘긴 '어른'들은 결혼도 하고 애도 몇몇 나아서 기르고 있으니 내 눈엔 삼십대는 그냥 아줌마 아저씨였다. 애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그래서 서른을 기준으로 몇 가지 인생 목표를 잡았다. 첫사랑과 서른 되기 전에 결혼하는 것 (당시 만나던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별을 겪고 싶지 않다는 막연한 마음에 한 생각이다), 삼십대 초반이 되면 아이는 두 세명은 낳아 기를 것. 서른 되면 죽고 싶다는 꿈과는 모순이 되는 인생 목표였지만 어쨌든 십대때 생각은 그랬다.
서른이란 마감 시점이 있어 덕분에 십대 이십대를 정말 열심히 살았다. '바람의 딸' 한비야의 저서를 읽고 도전받아 나도 혼자 배낭을 메고 오지와 사막 등 여행도 해보고, 4년 모아둔 전재산(?)을 챙겨 영국에서 홍콩으로 무작정 건너갔다가 7개월 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해 꽤나 맘고생한 적도 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건강과 자유가 사라지기 전 보고 싶고. 먹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것 모두 다 꼭 해봐야 했다.
몇 년만 지나면 삼십대가 아닌 사십대로 접어들 지금의 난, 아직도 어렸을 때 가졌던 꿈들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이루지 않았다.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 보니 결혼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후순위로 밀리게 됐고 첫사랑과 헤어진 지는 벌써 15년이 넘었다.
억대 연봉. 글로벌 기업 취업. 다 해보고 퇴사했더니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더욱더 신나고 재밌어졌다. 돈도 없고 안정적인 직업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애도 없는데 사는 게 왜 이리 흥겨운지. 비록 흰머리는 더 많아지고 가끔 몸도 여기저기 삐걱거리긴 하지만. 허리가 욱신거려 하이힐 신어 본 지 오래고 술 마시면 잠이 쏟아져 좋아하던 클럽 가는 것도 이젠 접었지만. 그래도 서른에 죽지 않길 참도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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