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나

꿈은 언제나 유효하다

by 김지수

대학 시절 몇 개의 악기를 배우고, 몇 개의 스포츠를 하고, 책을 많이 읽고, 여행을 자주 하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그런 얘기를 꺼내면 미친 사람 취급받았다.

공무원이던 아버지 아래서 유학은 꿈도 꿀 수 없고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기도 힘들어 지방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당시 인터넷도 없고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하던 세상도 아니고 세상과 통로는 오로지 책과 음악이 전부였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 서점에 가서 책 몇 권을 구입하고 음반 가게에 달려가 레코드를 구입하며 행복했다.

대학교에 들어가 관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을까 고민하다 우연히 클래식 기타반에 들어가 친구 오빠를 만났고 오빠는 클래식 기타반에 들어오라고 권유해 그렇게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보고 반해버린 바이올린에 대한 미련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부모님에게 바이올린 배운다고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고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종사해 첫 급여를 받자 악기점으로 달려가 바이올린을 구입했고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나의 어릴 적 꿈이 부화하기 시작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 어느 날 낯선 도시 뉴욕에 와서 살 거라 아무도 몰랐고 어느 날 운명의 종소리를 타고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뉴욕에 왔다. 제2의 인생을 새로운 나라 새로운 땅에서 시작하는 것은 지옥의 불길처럼 뜨거웠다.

낯선 도시에 오니 이방인으로 변했다. 익숙한 것과 결별이 유학과 이민이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민 가방 몇 개에 꿈과 희망을 담고 뉴욕에 와서 눈물을 뿌리며 텃밭을 가꿨다. 매일매일 우리는 눈물을 뿌려 꿈과 희망의 나무를 길렀다.

뉴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뉴욕에서 세상과 통로는 학교였다. 죽음 같은 공부를 하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하나씩 둘씩 새로운 세상에 노출되며 새로운 문화에 노출하며 적응이 되어갔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소에서 일하다 어느 날 연구소 그만두고 매일매일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가서 낯선 거리거리를 걷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북 카페에 가서 책을 읽다 뉴욕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놀이터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만약 직장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우울증에 걸려 시름시름하며 세월을 보냈다면 난 이 아름다운 뉴욕을 영원히 발견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무도 내게 뉴욕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고 혼자 스스로 발견했다. 무궁한 보물이 숨겨진 아름다운 도시란 것을.

링컨 센터 도서관에서 열리는 무료 뮤지컬과 오페라와 앙상블 공연을 보고 어느 날 카네기 홀에서 고등학교 시절 사랑하던 빈 소년 합창단 공연을 보고 카네기 홀에서 대학 시절 자주 듣던 안네 소피 무터와 크리스토프 에센 바흐 공연을 보았다. 한국은 클래식 공연이 비싼 편이라 서민에게 하늘처럼 높지만 뉴욕은 저렴한 티켓을 판매하니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분이고 열정이 있다면 오래오래 줄을 서서 저렴한 티켓을 사서 세계적인 공연을 볼 수 있다.

대학 시절 음악 동아 잡지에서 보던 줄리아드 학교가 나의 놀이터로 변했다. 1년 700개 이상 공연이 열리는 줄리아드 학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학교고 일부 공연은 유료이지만 꽤 많은 공연을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하니 보고 싶은 만큼 많은 공연을 볼 수 있다.

북 카페에 가면 커피 한 잔 마시면 종일 책과 잡지를 무료로 읽을 수 있다. 신간 서적을 무료로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대학시절 읽다 던진 '뉴스 위크'와 '타임지' 잡지도 읽을 수 있다. 그때는 글씨가 너무 작다고 불평을 했고 모른 단어가 투성이라 몇 줄 읽다 던져버린 경우가 많았다.

대학 시절 버지니아 울프 '달러 웨이 부인' 소설을 읽으며 런던에 대한 상상을 하고 문화가 한국과 정말 다름을 알게 되며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사는 것을 꿈을 꾸며 살았다. 또한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전시회를 보고 많은 공연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그 꿈이 이뤄질지 몰랐고 뉴욕이 대학 시절 꿈꾸던 도시란 것을 알게 되었다.

명성 높은 음악가, 작가, 화가, 영화감독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뉴욕에 와서 공연을 하고 강의를 하고 전시회를 연다. 셀 수 없이 많은 전시 공간이 있어서 보고 싶은 만큼 많은 전시회를 볼 수 있고 자연 또한 아름다워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봄이면 노란 수선화와 라일락꽃향기 가득하고 난 축제와 벚꽃 축제가 열리고 여름에는 지하철을 타고 달리면 푸른 대서양 파도가 춤추는 것을 보고 가을에는 노랗고 붉은 단풍이 춤을 추는 가을 제전을 보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내리면 동화의 나라로 변한다.

세상의 한 복판 뉴욕에 와서 살게 될 거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옥처럼 견디기 어려운 순간도 맛보고 천국처럼 달콤한 순간도 맛보며 비록 마룻바닥에 침대 매트리스 하나 깔고 지내는 현실이 지옥처럼 견디기 힘들지라도 제2의 생을 열어가고 있다.

삶은 때때로 꿈처럼 아름답고 삶은 때때로 지옥처럼 슬프다. 바람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폭풍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폭우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삶은 항상 눈부신 햇살이 반짝거리는 것은 아니다. 봄여름 가을 겨울처럼 변화무쌍하고 인간이 알 수 없는 일이 찾아온다. 언제나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내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중요하다. 나의 최선을 다하면 어디로 길이 열릴지 모른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시처럼 어느 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고 뉴욕에 가서 공부하고 살 것에 대해 남들이 불가능한 꿈이라고 했지만 난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다. 지옥처럼 견디기 어려운 환경 속에 두 자녀는 대학을 졸업했다. 꿈은 언제나 유효하다. 마감일이 없다.


기억에 지난 2월 쓴 초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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