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하늘에 구름 가득 달님은 어디로 꼭꼭 숨어버렸어. 쌀쌀한 시월의 바람을 맞고 집에 돌아왔다. 아들이 만든 닭 가슴살 요리를 맛있게 먹고, 내일 날씨를 확인하고 홍수 경보라 하니 마음이 무겁고, 내일 스케줄을 다시 확인한다. 삶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을 세우고 뜻대로 되지 않아도 된다. 삶이 항상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님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금요일 오후 맨해튼 음대에서 바이올린 마스터 클래스(Glenn Dicterow 바이올리니스트)가 열렸지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파트 지하에서 세탁을 하는 동안 글을 쓰고, 브런치를 만들어 먹고, 늦게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가니 볼 수 없었다. 지난번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바이올린 마스터 클래스 본 것으로 충분하니 괜찮다. 카네기 홀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유자 왕 공연이 열려 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난 링컨 센터에 갔다. 누가 카네기 홀에 갔을지 궁금하고 공연은 어떠했을까. 지난봄에 카네기 홀에서 유자 왕 공연 봤으니 역시 괜찮다. 보고 싶은 만큼 다 볼 수는 없고 뉴욕에 사니 꽤 많은 공연을 보는 편이니 감사한 마음이 들지.
금요일이니 모마와 메트 뮤지엄과 휘트니 뮤지엄과 모건 라이브러리 앤 뮤지엄 등 밤늦게까지 문을 여니 뮤지엄에 가도 좋으나 뮤지엄 방문은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피곤하면 안 가는 게 정답이다. 오늘이 그랬다. 낮은 에너지로 방문하기 어려우니 대신 줄리아드 학교에 가서 첼로와 바이올린 공연을 보고 링컨 센터 앨리스 툴리 홀에서 열리는 컨템퍼러리 공연 Juilliard’s AXIOM(지휘자
Jeffrey Milarsky) 공연을 봤다. 공연 사진은 촬영 금지라 올릴 수 없다.
저녁 6시 첼로 공연이 열렸고 아버지가 어린 딸을 데리고 와서 공연을 보니 약간 놀랐고, 자주 만나는 노인들도 보고, 교수님과 학생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이 모두 모여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과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을 들었다. 자주 줄리아드 학교에서 본 얼굴인데 중국인 학생인 줄 모르고 한인 학생인 줄 알았다. 첼로 연주가 꽤 좋아 인상적이었다. 프로 음악가로 충분한 재능이 있어 보였고 다음으로 바이올린 공연을 봤고 바흐, 모차르트와 낯선 작곡가 곡이 프로그램에 보였고 링컨 센터 앨리스 툴리 홀에서 열리는 AXIOM 공연과 스케줄이 겹쳐 조금만 보고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앨리스 툴리 홀로 갔다.
AXIOM 공연 티켓은 반드시 줄리아드 학교와 링컨 센터에서만 받으라고 했고 오늘 늦은 오후 줄리아드 학교 박스 오피스에 가서 달라고 하니 영화배우처럼 생긴 젊은 뉴요커가 무료 표를 건네주니 기분이 좋았다. 죽을 거처럼 피곤한 몸으로 집에서 그냥 쉴까 하다 힘을 내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맨해튼에 도착. 플라자 호텔 근처 지하철역에서 내려 센트럴파크로 들어갈까 하다 너무 추워 버스가 오기에 달려가 시내버스를 타니 젊은 기사가 달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친절하게 말했다. 플러싱 시내버스 기사보다 맨해튼 기사가 훨씬 더 친절하게 보이는데 확실히 그런지는 모르고 내 경험상 그렇다. 어제도 오늘도 플러싱에 도착해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제시간에 오면 세상이 폭발할 듯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고 추운 날 몸이 꽁꽁 얼어가는데도 늦게 늦게 도착했다.
맨해튼에 가면 꽤 많은 공연을 볼 수 있으나 다른 일도 많아서 사실 매일 공연 보는 것은 쉽지는 않다. 매일 공연 보는 것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볼 수 있고 대신 다른 일은 할 수 없게 된다. 여행객 많은 맨해튼 거리거리가 복잡하고 더러운 곳이 많고 그래서 피곤하지만 링컨 센터와 줄리아드 학교와 맨해튼 음대와 콜롬비아 대학 등은 여행객이 자주 찾는 장소가 아니라 조용하고 좋다. 카네기 홀은 가끔 소란스러운 청중이 있어서 피곤하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마음이 아니니 참고 견뎌야지. 세계적인 음악가 공연 보는 것만으로 감사해야지. 링컨 센터 데이비드 게펜 홀에서는 10월 25-27일 사이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 연주가 열린다. 뉴욕은 음악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다. 좋은 공연 많이 볼 수 있어서 그렇다.
시월이 저물어 가지만 뉴욕은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는데 이웃 블로그 보니 서울은 단풍이 참 예뻐. 아름다운 시월 파란 가을 하늘을 몇 번이나 봤을까. 자주자주 흐린 가을 하늘만 보여줘 슬퍼. 사랑하는 거버너스 아일랜드에 가 보려고 계획 세웠는데 날씨도 춥고 흐린 날이라 자꾸 미루며 시간만 보내고 있다. 거버너스 아일랜드는 곧 문을 닫고 이제 내년 5월에야 방문할 수 있는데. 토스카니니 지휘자와 마크 트웨인이 살던 아름다운 <웨이브 힐>에도 방문하지 너무 오래되어 가니 요즘 에너지가 낮은 건가. 집에서 가깝지 않아서 마음처럼 자주 방문하기는 어렵기만 하다. 마음은 아름다운 숲에서 한가로이 휴식하고 싶은데. 구겐하임 저택이 있는 롱아일랜드 < Sands Point>도 정말 그리워. 그곳으로 가는 도로 가로수 단풍도 너무너무 예쁜데 차가 없으니 비싼 택시를 타고 달려갈 수도 없고 대중교통 이용하기는 너무 불편해서 사랑하는 롱아일랜드가 머나먼 나라로 변했어. Sands Point는 숲과 바다를 동시 볼 수 있어서 너무 아름답고 어느 해 딸을 데리고 갔는데 행복한 표정을 짓더라. 자연이 이리 아름다워하면서. 노랗게 물든 숲 속에서 산책하는 행복은 생각만 해도 행복이 밀려온다.
시월이 저물어 가고 나뭇잎은 노랗게 물들어 갈 시기 오래오래 전 자주 읽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시도 생각이 난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뉴욕 초기 정착 시절 딸이 처음으로 다니던 롱아일랜드 이스트/웨스트 헤프 할로우 고등학교에 데려다 줄 무렵 노란 숲 속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단풍이 이리 예뻐하면서. 첫해 롱아일랜드 딕스 힐에 살 때 단풍이 정말 곱고 예뻐 놀랐다.
이제 좀 더 기다려 날씨 좋으면 예쁜 단풍을 보러 가야지. 뉴욕 단풍 보기는 아직 좀 빠르고 11월 초가 지나야 볼 수 있다. 센트럴파크 단풍이 예쁘고, 뉴욕 식물원과 브루클린 식물원도 예쁘고, 뉴욕은 자연이 아름다워 공원 단풍도 예쁘다.
내일은 종일 비가 내린다고. 가을비 맞고 맨해튼 여기저기 서성거리겠구나.
10. 26 금요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