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날
시월의 마지막 날 핼러윈 아침 하얀 창가로 가을 햇살이 비친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끓여 랩톱을 켰다. 해마다 맨해튼 어퍼 이스트사이드와 어퍼 웨스트사이드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핼러윈 장식을 보곤 했는데 올해 주택가를 서성거리지 않았나 보다. 작년 사진 꺼내 보며 추억에 잠겨.
맨해튼 어퍼 이스트사이드 주택가 핼러윈 장식
어제저녁 아들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바이올린의 거장 막심 벤게로프 바이올리니스트 연주를 감상하고 자정 무렵에 집에 돌아왔다. 그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음색에 반해버렸다. 자주 카네기 홀과 줄리아드 학교와 맨해튼 음대에서 공연을 보곤 하지만 어제 같은 바이올린 음색은 생에 처음이었다. 그가 사용한 바이올린은 1727년 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카네기 홀 막심 벤게로프 공연
Maxim Vengerov, Violin
Roustem Saïtkoulov, Piano
BRAHMS Violin Sonata No. 3 in D Minor
ENESCU Violin Sonata No. 2 in F Minor
RAVEL Violin Sonata
ERNST The Last Rose of Summer
PAGANINI I palpiti (after Rossini's 'Di tanti palpiti' from Tancredi; arr. Fritz Kreisler)
처음 두 곡 연주하고 휴식 시간 후 연주가 차츰 더 좋아졌고 바이올린리스트로 가장 돋보인 연주는 네 번째 곡 연주. 기교가 너무나 어렵게 보여 아무나 연주할 수 있는 곡은 아니고 나도 어제 처음으로 그 곡을 감상했다. 어릴 적 비에니아프스키와 칼 프레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 연간 130회 연주회를 하고, 2002년 그라모폰 <올해의 연주자 상>과 2004년 <베스트 협주곡상>을 수상했지만 2007년 바이올린 연주활동을 중단할 거라고 공식 선언했다고.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어깨 부상이 악화되어 바이올린 연주가로서 활동을 중단하고 그 후 지휘자 공부를 해 2007년 카네기 홀에서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다고. 2011년 벤게로프는 재활치료를 하고 4년 만의 공백을 채우고 바이올리니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카네기 홀에서 벤게로프 공연을 보러 가서 몇몇 얼굴이 익은 러시아 출신 노인들과 만나 이야기도 하고 런던과 뉴욕에서 사는 할아버지도 만나 런던 이야기도 들었다. 러시아 출신 할머니 이름은 나타샤.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한 피아니스트. 언젠가 영어로 된 탐정 소설을 읽어서 왜 읽는지 이유를 묻자 영어 공부를 위해 읽는다고 하셨다. 나타샤는 현존 최고 3명의 바이올리니스트에 벤게로프가 속한다고 하면서 아들과 내가 사랑하는 카바코스와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Christian Tetzlaff와 벤게로프라고. 지난번 유자 왕 공연이 너무나 좋았다고 하셔 그날 카네기 홀에서 유자 왕 공연 안 봐서 아쉬움이 들었다. 링컨 센터에 갈지 카네기 홀에 갈지 망설이다 링컨 센터에 갔는데. 지난봄 처음으로 유자 왕 공연을 봤고 그때 공연은 명성 높은 피아니스트 기대를 충족하지 않았다고 하니 나탸사가 프로 음악가 연주도 항상 좋을 수만 없고 그때그때 다르다고. 라이브 무대 공연이 누가 쉽다고 하겠니. 모스크바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할아버지도 그제 카네기 홀 웨일 리사이틀 홀에서 첼로 공연을 봤는데 너무나 좋다고 하셨다. 런던에서 40년 전 파이낸셜 분야에서 일하다 10년 전 은퇴하고 런던과 뉴욕을 자주 왕래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는 할아버지는 보스턴 출신이고 부인은 노르웨이 출신이라고. 런던에서 벤게로프 바이올린 마스터 클래스를 5불 주고 봤다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뉴욕에서 인기 많아 티켓 구입하기 어려운 <해밀턴 뮤지컬>을 세 번이나 봤다고. 그분의 런던 이야기를 듣자 런던이 그리워졌다. 2000년 처음으로 런던 여행을 가서 비싼 물가에 놀랐던 이야기 하니 그 할아버지는 여행객이 잘 몰라서 비싼 곳을 다녀 그런다고. 카네기 홀에서 타임스퀘어 정도 거리도 여행객은 비싼 지하철(5불)을 타지만 런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걷는다고 하셨다. 런던에서 1년 동안 공부했던 딸이 런던에 여행 오라고 했지만 당시 공부 중이라 수업 준비와 시험 준비로 너무 바빠 런던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런던 지하철은 뉴욕보다 더 깨끗하나 교통 요금이 뉴욕보다 더 비싼 곳. 음악을 좋아한 사람들을 만나면 음악 이야기를 하며 행복하다.
크리스티 경매장
어제 라커 펠러 센터 크리스티 경매장에 가서 부자들 잔치도 구경했다. 멋진 의상을 입은 몸매도 멋진 사람들도 보고 잠깐 갤러리 구경하고 떠났다. 멋쟁이는 사진에 담지 못했어. 내 옆에 서 있는데 바로 앞에서 사진 담기 불가능해서. 전시장에 놓인 단감과 붉은 석류는 진짜.
며칠 전 봤던 예쁜 시계는 어디로 사라져 안 보였다. 너무너무 예뻐 시계 주인이 누군지 봤는데 루이 14세 국왕이라 웃었어. 크리스티 경매장은 백합 향기 가득하고 조명도 아름다운 갤러리에서 잠깐 휴식을 하고 근처에 있는 사랑하는 채널 가든에 가서 호박과 국화꽃 장식을 봤다.
라커 펠러 센터 채널 가든
계절마다 채널 가든 장식이 변하고 언제 봐도 예쁜 정원. 곧 할러데이 시즌 장식으로 변할 거 같아.
채널 가든을 떠나 5번가 반스 앤 노블 북 카페에 가서 수프를 먹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연인들도 찾아오고 친구들도 찾아오고, 혼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랩톱으로 작업을 하는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공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아들 운동복을 사야 하니 서점을 나와 5번가 숍을 돌아다녔다. 마음에 들면 가격이 너무 비싸 눈이 감겼다. 왜 눈이 자주 감기는지. 그런다고 안 살 수도 없고. 아 한숨이 나올 뻔. 추운 날이라 운동복도 필요해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뉴욕 공립 도서관 앞에 내렸다. 여기저기 종일 걸어 힘이 없어서 어제는 시내버스를 탔다. 저녁 6시 무렵 버스는 텅텅 비어 얼마나 좋던지. 지하철은 지옥일 텐데.
뉴욕 지하철은 항상 붐비는 편이지만 출퇴근 시간은 지옥이다. 어제도 플러싱 종점 지하철역에서 7호선을 타고 맨해튼에 오는데 종점역인데 지하철에 빈자리 찾기 너무나 어려워 숨이 헉헉 막힌다. 그럼 서서 있는 것은 좋은가. 승객이 너무 많아 서서 지하철 타는 것 역시 지옥이다. 어제 아침 일찍 아파트 문을 잠그는 사이 도로에 시내버스가 휙 하고 달려 속이 상했지만 버스 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얼마 되지 않아 다음 버스가 도착해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생도 그러면 얼마나 좋아.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얼마나 좋겠어. 어제 아침 버스 기사도 너무 친절해 기분이 더 좋았지만 플러싱 메인 스트리트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7호선에서 빈자리 얻기가 어려워 금세 평화의 순간이 사라져 버리고 전쟁터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매일 지옥철을 타고 맨해튼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 마음이 어떨지.
5번가 뉴욕 공립 도서관 정원은 국화꽃이 피어 가을 향기 느끼면서 거닐다 브라이언트 파크를 지나 운동복을 파는 스포츠 매장에 도착해 아들이 입을 만한 운동복을 골랐다.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은 운동복으로. 나이키 운동복을 골라 직원에게 세일 안 해주냐 물으니 그런 거 없다고 해 할 수 없이 계산을 하고 떠났다.
맨해튼 곳곳에 홈리스 가득하고 럭셔리 매장 삭스 핍스 백화점 앞에는 홈리스 앉아 "가족을 만나러 집에 돌아갈 기차표를 구입할 33불이 필요해요"라 하니 할러데이 시즌이라 사람들 마음이 더 움직일까.
시월의 마지막 날 핼러윈 축제가 열리는데 거기에 갈 에너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맨해튼에서 열리는 축제 보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해. 너무너무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축제. 얼마나 많은 유령들이 등장할까. 카네기 홀에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공연도 열리고 난 오늘은 좀 쉬고 싶어.
10. 31
시월의 마지막 날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