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 설거지를 하고 노란 유자차 끓여 테이블 앞에 앉아 조용히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 무엇을 할 건가 생각할 시간.
어제는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 같은 마법처럼 아름다운 날씨였다. 오전 아파트 지하에 내려가서 세탁을 하니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뉴욕에 와서 공동 세탁기 사용하니 마음이 불편하지만 세탁을 마치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진다. 세탁하는 동안 미트볼 스파게티를 만들고 식사를 하고 아들과 함께 며칠 전 딸이 소개해 준 영화를 봤다. 영화 타이틀은 RBG. U.S. Supreme Court Justice Ruth Bader Ginsburg 다큐멘터리 상영시간은 98분이었다. 어릴 적 엄마를 잃고, 코넬대를 졸업한 Ruth Bader Ginsburg의 굴곡 많은 인생이 펼쳐진다. 코넬대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진학하고 결혼하는데 남편이 암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그녀가 코넬대 재학 중일 때 여자가 소수라 남자들에게 인기 많으니 매일매일 다른 남자 만나서 데이트했다고 하니 웃었어. 암튼 그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어렵고 힘든 로스쿨 공부하면서 아이 키우면서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역경을 극복하고 나중 미국사에 남은 판사가 된 그녀.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라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딸이 소개하지 않았다면 난 영원히 모르고 지낼 뻔했다. 그리 명성 높은 RBG인데 난 금시초문이었어. 미국인이 사랑한 분이라 그분의 얼굴이 담긴 티셔츠와 머그컵도 판매하고 심지어 그녀 얼굴을 문신까지 한다고 하니 놀라워. 늦게 뉴욕에 온 난 천천히 미국 역사와 문화에 노출되어 간다.
세탁을 마치고 영화를 보고 나서 평소보다 약간 늦게 맨해튼에 갔다.
어제저녁 8시 카네기 홀에서 뉴욕 코러스 페스티벌이 열렸다. 2011년 일본 지진과 쓰나미 피해자와 지역 및 국제 사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콘서트. 무료 공연이지만 미리 티켓을 받아야 했는데 며칠 전 카네기 홀 박스 오피스에 가니 매진이라고. 개인당 6매의 티켓을 준다고 카네기 홀 웹페이지에 떴지만 매진이라고 하니 슬펐지만 어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박스 오피스에 가서 티켓 있는지 물었다. 운 좋게 1장을 받았어.
만약 티켓이 없으면 돌아서려고 마음먹은 일이라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공연은 항상 열리는 것은 아니므로 보고 싶은 마음도 강렬했다. 만약 포기하고 가지 않았다면 어제 공연을 볼 수도 없었어. 작년에도 카네기 홀에서 봤던 공연이고 일본의 전통 의상 기모노를 입고 무대에 올라 합창을 부르는 팀도 있었다.
평범한 내게 재주가 없지만 특기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어.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도 괜찮아. 만약 안 되면 다른 길을 찾아봐야지. 보통 가정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고 나의 한계가 너무나 많아서 슬프지만 어떡해. 할 수 없지. 내 능력과 환경을 받아들여야지. 나의 최선을 다하면 되고 나머지는 하늘의 뜻.
무료 티켓 한 장 받기는 쉽지 않아.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암튼 다시 카네기 홀에 가서 티켓 있나 물으니 여분의 티켓이 있어서 받았는데 평소 카네기 홀 하늘 닿을듯한 꼭대기 발코니 석에 앉아서 공연 감상하는데 무료 티켓은 대개 좌석도 좋은 편. 어제 티켓 좌석도 너무 좋아 기분이 룰루랄라.
그뿐만이 아냐. 복도를 걷다 우연히 대학 시절 사랑한 로스트로포비치 첼리스트 사진과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자 카라얀과 노벨상을 받은 밥 딜런과 잠시 연인으로 지낸 존 바에즈와 첼리스트 요요마와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 등의 사진을 보았다. 행운이었어. 사진에 담긴 그들의 얼굴을 보며 잠시 추억에 젖었지. 대학 시절 로스트로포비치 연주로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던가. 세월이 흘러 먼 훗날 내가 바흐 곡을 레슨 받을 거라 미처 꿈도 꾸지 못했는데 두 자녀 악기 레슨 때 도와주면서 중단했던 악기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 바이올린을 계속 받을까 하다 30대라 첼로의 저음에 매력을 느껴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가서 혼자 조용히 존 바에즈 곡을 들으며 행복했던 추억도 떠올랐어. 음악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영혼의 치료제. 음악 없는 삶은 상상 조차 불가능해. 어느 날 거실에서 사랑하던 첼로가 부서진 후 다시는 첼로 활을 잡지 않지만 지금은 자주 음악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아들은 엄마가 다시 레슨 받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아직은 너무너무 복잡하다.
어제 첫 번째 무대에 오른 팀도 예쁜 기모노를 입고 합창을 불러 어떤 기모노가 가장 예쁜지 생각을 했다. 일본인을 위한 공연이라 일본어가 많이 들려왔다. 뉴욕에서 만난 일본 모자 디자이너는 어제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돌아갔고 예일대 졸업한 수잔도 만나지 못하고 음악을 전공한 K도 만나지 못했다. 지난번 뉴욕에 여행 왔던 할머니도 생각이 난다. 뉴욕에 와서 매일 오페라 보고, 카네기 홀에서 공연 보고 뮤지엄 순례하다 일본에 돌아간 할머니. 혼자 뉴욕에 여행 와서 뉴요커처럼 지내니 놀랐는데 할머니가 오래오래 전 런던에서 1년 이상 지내며 오페라 보고 뮤지컬 공연 보고 뮤지엄 순례를 했다고. 오페라와 뮤지컬의 재미를 못 느끼면 봐도 흥미가 없어서 뉴욕에 와도 다른 세상을 보고 떠난다.
뉴욕을 떠오르게 한 노래 '뉴욕 뉴욕'도 부르고 내가 잘 모른 일본 노래도 불러서 감사함으로 공연을 보고 집에 돌아왔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뉴욕 뉴욕 노래를 들으면 뉴욕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한국에서는 MY WAY 노래를 더 자주 들었다. 대학 시절이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노래.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걷는 나라서 더 감동적인 노래가 된지도 몰라. 하늘이 준 내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천천히 천천히 주어진 내 길을 가야지.
어제저녁 6시 줄리아드 학교에 가서 Christine Wu, Violin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봤다. 이름이 동양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아 구글에 검색하니 독일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 타이완계 아버지와 독일계 미국인 엄마 사이에 탄생해 어릴 적 미국에 왔고 그녀를 보며 세상이 얼마나 변하고 있는지 실감했다. 과거 단일 민족 한국에서 상상도 못 한 다문화가정이야. 아름다운 사라사테와 포레와 크라이슬러 곡 등을 감상하며 행복했어.
SOFIA GUBAIDULINA Der Seiltänzer (Dancer on a Tightrope)
PABLO DE SARASATE Introduction and Tarantella, Op. 43
GABRIEL FAURÉ Sonata No. 1 for Violin and Piano in A Major, Op. 13
FRITZ KREISLER Slavonic Fantasie on Themes by Antonin Dvořák
유튜브에서도 오늘도 날 위로하는 자클린 뒤프레의 첼로 선율이 들려오는구나. 어제도 더 많은 공연을 볼 수도 있었지만 세탁하고 영화 보고 늦게 맨해튼에 가니 볼 수 없었다. 다인종이 거주하는 맨해튼은 정말 마법의 도시 같아. 매일 공연 보고 전시회 보고 책 읽고 다양한 사람들 만난 점이 참 좋아.
어제 우연히 블로그 친구가 작년 여름부터 많이 아프단 소식을 들어서 마음이 아팠다. 치료 중이라고 하는데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한동안 블로그 활동을 하지 않아서 안부가 궁금했던 사진작가가 빨리 치료가 되길 기도한다. 건강의 소중함을 늘 잊고 사는 현대인. 너무너무 바빠서 잊고 살지만 한번 아프고 나면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운동과 명상과 산책이 건강에 너무나 좋아. 나도 점점 나이가 드니 가장 걱정된 게 바로 건강이다. 내가 아프면 어떡해. 그래서 자주 운동하려고 노력한다. 어젯밤에도 늦게 집에 돌아와 아들과 함께 호수에 산책하러 갔다. 조용히 잠든 호수에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점점 호수와 사랑에 빠졌어. 호수에서 산책하면서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것도 좋아.
오늘도 바빠. 얼른 브런치 먹고 장 보러 가야겠다. 아마도 늦은 오후 맨해튼에 도착할 거 같아.
매일 행복을 찾아야지. 누가. 스스로 해야지. 내가 사랑하는 것과 함께 행복을 찾아야지. 파란 하늘 보고 새들의 합창 들으며 거닐어도 좋겠다.
4. 4 목요일 아침 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