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수요일
8월 7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념일이다. 아주 오래전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어린 두 자녀랑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뉴욕에 왔다. 뉴욕이 세계의 중심지란 것도 모르고 낯선 도시 뉴욕에서 어떤 삶이 펼쳐질지 모르고 왔다. 인천 공항에서 출발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도착한 첫날 우리의 첫 식사는 한국 라면이었다. 인터넷으로 구한 집은 뉴욕 롱아일랜드 딕스 힐(Dix Hills)이었다. 이민 가방 몇 개에 꼭 필요한 짐만 들고 왔으니 당장 덮고 잘 이불과 베개도 없었다. 그냥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요술램프라도 있으면 푹신한 침대와 이불과 베개를 주문할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토요일 서부에서 딸이 뉴욕에 왔고 며칠 머무른 동안 뉴욕대 학생들과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8월 7일만큼은 특별한 기념일이라 함께 근사한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미리 일식 레스토랑에 예약을 했지만 딸이 점심시간을 비우기 어려워 결국 레스토랑 예약을 취소해버렸다.
수요일 아침(8월 7일) 두 자녀와 미드타운 Le Pain Quotidien에서 식사를 했다. 라지 커피를 주문했는데 한국 숭늉이 생각나게 할 정도로 큰 그릇에 담아져 있어 놀랐다. 뉴욕에 꽤 많은 지점이 있는데 실은 난 처음으로 방문했다. 커피와 음식 맛이 좋았다. 가볍게 식사할 수 있고 친구들 만나 시간 보내기 좋을 거 같고 혼자 노트북 들고 작업하는 사람도 있더라.
딸은 뉴욕대에 일하러 가고 아들과 난 맨해튼 미드타운 East River 근처에서 산책을 했다. 멀리 퀸즈보로브릿지와 유엔 빌딩이 보였다. 공원 벤치에는 홈리스 두 명이 잠들어 있고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뉴요커도 보고 페리를 타고 맨해튼으로 출근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호텔에서 딸 짐을 들고 플러싱 집으로 돌아오려고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7호선에 탑승 플러싱에 도착 다시 시내버스에 탑승했는데 그만 고장이 나서 버스가 멈춰버렸다. 할 수 없이 땡볕 아래 트렁크를 들고 걸었다.
고개 숙인 노란 해바라기 꽃과 능소화 꽃 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뉴욕에 살면서 시내버스가 고장이 난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전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무렵 한인 여행사에 예약을 하고 서부 여행 갔는데 여행사 버스가 고장이 났다. 기억에 7월 말 무렵이라 태양이 지글지글 타는 시점인데. 아, 죽어라 고생했던 서부 여행. 버스 투어를 하기엔 상당히 무리다. 아무것도 모르고 낯선 도로 운전하기 싫어하는 내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여행사 투어를 했지만 광활한 미국 서부 여행이 상당히 힘들기만 했다. 시내버스가 고장이 나니 서부 여행사 버스 타이어가 터진 기억이 났다.
딸은 종일 뉴욕대에서 일하고 저녁 7시가 지나 집에 도착했다. 특별한 기념일(8월 7일)이고 두 자녀는 한국 양념 통닭을 좋아해 전화를 걸어 배달해 달라고 주문했는데 하필 프라이드치킨이 배달되었다. 종이 박스를 여니 양념 통닭이 안 보여 전화를 걸어 왜 프라이드치킨을 보냈냐고 하니 내가 그걸 주문했다고. 아주 특별한 날이라 양념 통닭을 주문했고 한 번도 프라이드 통닭을 주문한 적이 없는데 직원은 우겼다. 차도 없고 집에서 처갓집 양념 통닭집까지 가깝지도 않고 내가 가게에 가서 교환해 달라고 하긴 무리였다. 저녁 무렵 비가 내렸다. 직원은 양보를 하지 않았고 할 수없이 프라이드치킨을 먹었다. 아들은 엄마의 불편한 마음을 읽고 양념 통닭 소스를 만들었다. 새우 된장국을 끓이고, 삼겹살을 굽고 나물과 김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라면을 먹은 것에 비하면 근사한 식사를 했다. 서부에서 온 딸이 한국 참외와 배를 먹고 싶다고 하니 한인 마트에 가서 참외와 배를 샀다. 실은 뉴욕에 와서 처음으로 먹은 한국 참외와 배다. 한국 과일이 저렴하지 않아서 한 번도 구입하지 않았다. 삶이 뭐길래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살아야 하나 몰라.
아무것도 모르고 뉴욕에 와서 새로운 삶을 열어갔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뉴욕은 황무지였다. 우리 가족의 첫 정착지가 뉴욕시였다면 고생을 덜 했을 텐데 롱아일랜드 딕스 힐은 차 없이 지낼 수 없는 곳이라 말로 할 수 없는 고생이 시작되었다. 집 근처에 가까운 주유소 하나만 있었다. 수년 전 파이어 아일랜드 가려고 우리가 살던 딕스 힐 근처를 지나니 그 주유소조차 사라졌더라.
뉴욕에 도착한 다음날 조립 가구를 파는 힉스빌(Hicksville) IKEA에 가서 이불과 베개와 침대와 책상과 의자와 소파를 주문해 두 자녀는 눈만 뜨면 가구를 조립하기 시작했는데 약 한 달가량 걸렸다. 큰 침대와 책상 등 가구 조립이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조립된 침대 가구를 사용해서 얼마나 조립이 어려운지도 몰랐다. 문방구를 파는 스테이플에 가서 학용품도 구입하고 냉장고를 사러 베스트바이에도 가고 인간이 살기에 최소 필요한 것을 갖추는데 약 한 달이 걸렸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차가 있다면 그나마 편했을 텐데 차가 없으니 빨래방을 가기 위해 오래오래 땡볕 아래 걸었다. 마트에 장 보러 가는 것 역시 힘든 일이었다. 첫해 8월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결코 잊을 수 없다.
뉴욕 운전 면허증의 씁쓸한 추억은 또 어떤가. 한국에서 수 십 년 운전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운전 면허증이 받기 어렵다고 하니 플러싱 한인 자동차 학원에 찾아가 강사에게 연수를 받았다. 1시간당 40불씩이나 줬다. 롱아일랜드 딕스 힐에서 플러싱 까지 교통이 무척 불편해 운전 연수받으려면 하루를 허비한 셈이다.
그런데 운전 실기 시험을 받으러 브롱스에 가니 운전 학원 측에서 대여한 자동차가 상업용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시험도 보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야 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제야 학원 강사는 고백을 했다. 학원 측은 상업용 보험에 들지 않았지만 한 번도 들통이 나지 않았다고 하필 내가 시험 볼 때 들통이 났다고.
다시 운전면허 시험 접수를 하고 기다려야 하는 입장. 뉴욕에서 운전면허 시험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대개 접수를 하고 오래 기다린다. 두 번째 뉴욕 운전면허 시험을 보기 위해 다시 운전 연수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순진한 난 다시 운전 연수를 받았다. 물론 시간당 40불씩 내고. 딕스 힐에서 플러싱까지 오는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하루가 고생 바다였다.
그런데 두 번째 운전면허 시험 보는 당일 아침 강사가 운전 연수를 하고 시험 보러 가면 좋겠다고 하니 아침 10시부터 그를 기다렸는데 오후 2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정착 초기 휴대폰도 없던 시절 강사와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전화 한 통만 하자고 부탁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하필 그날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폭우 속에서 4시간 동안 강사를 기다렸다.
오후 2시 반 뉴욕 운전면허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다. 2시가 막 지날 무렵 강사가 도착해 내게 다짜고짜 왜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따졌다. 어이가 없었다. 휴대폰이 없는데 어찌 전화를 받아. 집에서 아침 일찍 나왔는데. 폭우 속에 내가 차를 운전하고 달려가 시험을 봤다. 뉴욕 운전면허 시험 가는 길 차에 기름이 없다고 주유소에 들려야 한다고 하니 주유소에 갔다. 마치 영화 촬영 장면 같았다. 폭우 속을 달려가 시험을 치렀다. 어렵게 어렵게 뉴욕 운전 면허증을 받았다. 강사는 내가 한국에서 수 십 년 운전 경력이 없었다면 시험에 낙방했을 거라고 말했다.
첫 한 달 동안 두 자녀가 공부할 학교에 가서 수속을 했다. 뉴욕은 학교에 수속하려면 건강 서류를 제출한다. 예방 접종 서류를 학교 측에 보여주니 빠진 게 있다고 하면서 예방 접종을 하고 서류를 다시 제출하라고. 뉴욕 플러싱 병원에 가서 예방 접종하는데 1인 100불. 눈물이 흐르더라. 비싸도 너무너무 비싼 의료비. 숨이 막힌다.
차를 구입하기 전 두 자녀는 학교에 오리엔테이션을 가고 내가 공부할 학교에도 찾아가 어드바이저를 만났다. 정착 초기 택시를 이용하지 않았다. 차가 없으니 두 자녀 학교와 내 학교에 가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아들은 오리엔테이션 받고 집으로 돌아오다 길을 잃어버렸다. 주택도 다 비슷비슷하고 골몰길도 비슷비슷했다. 금방 찾을 거 같았지만 쉽지 않았다. 땡볕이 내리쬐는 8월 아들과 난 4시간 동안 헤맸다.
특별한 기념일이라서 뉴욕 정착 초기 기억이 스쳤다. 낯선 도시 뉴욕에 와서 지낸 동안 두 자녀는 중고교 과정과 대학 과정을 졸업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뭐냐고 내게 묻는다면 싱글맘으로 두 자녀 뉴욕에서 교육하기라고 말하겠다.
살아가는 동안 힘든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언제나 내 몫이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언제나 혼자 처리했다. 두 자녀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사업 자금을 1주일 만에 마련해 오라고 명령을 했다. 혼자서 얼마나 많은 은행장을 만나러 갔을까. 한 번도 거래한 적이 없는 은행에 찾아가 대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거의 대부분 은행장들이 거절을 했다. 만 3달 걸려 필요한 거액의 금액을 마련했다. 더 힘든 일도 쉼 없이 일어났다.
8월 7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