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4일 목요일
전형적인 11월의 날씨였다. 아파트 뜰 고목나무는 가을색으로 짙어가고 뜰에는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마음은 자꾸 어디론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은 계절. 쓸쓸한 가을의 뒷모습을 보며 오후 4시 맨해튼 음대에서 열리는 첼로 마스터 클래스를 보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갔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첼리스트 John Sharp 마스터 클래스 보면서 하늘로 떠난 자클린 뒤프레(Jacqueline du Pré)가 떠올랐다.
마에스트로 다니엘 바렌보임과 영원한 사랑을 했다면 자클린 뒤 프레도 행복했을 텐데 왜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축복받은 사람은 배신이 얼마나 슬픈지 알까.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의 운명도 참 슬프고 내 운명도 참 슬프다. 오래오래 전 바흐 무반주 조곡을 레슨 받을 때 첼로가 부서져 버린 후 안개 가득했던 결혼 생활의 막이 내리고 뉴욕으로 떠나왔으니 어쩌면 첼로의 죽음은 내 운명의 전주곡 같아.
예쁜 커튼으로 장식된 홀에서 유명한 첼리스트와 첼로를 공부하는 학생들 곁에 앉아서 아름다운 첼로 선율 들으니 마치 영화 같은 순간이었지.
맨해튼 음대에서 저녁 6시에도 오페라 공연이 열리나 평소와 달리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링컨 센터에 내렸다. 날씨는 점점 추워져 가는데 아들이 입을만한 겨울 옷이 없어서 오랜만에 할인 매장 Century 21 쇼핑하러 갔는데 가격이 비싼 의류가 많아서 슬펐다. 겨울 외투라서 더 비싸기도 했지만 가격표에서 동그마니 하나를 빼도 되겠더라. 매장을 몇 번을 둘러보면서 가격 대비 만족스러운 외투 하나를 고르느라 혼이 났다. 쇼핑은 언제나 피곤해. 돈과 시간이 많다면 쇼핑이 즐거울 텐데 적당한 가격이란 조건에 맞아야 하고 멋진 디자인 제품을 고르고 싶으니 언제나 힘들다.
아주 오래전 센추리 21은 반스 앤 노블 서점이 있었던 곳이다. 두 자녀가 줄리아드 음악 예비학교에서 오디션을 치를 때 난 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내면서 오디션이 끝나길 기다렸던 곳인데 쇼핑 매장으로 변했다. 딸은 독학으로 공부한 작곡 오디션을 보고 아들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오디션을 치렀지. 길고 긴 세월이 흘러갔구나.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반 링컨 센터 The David Rubenstein Atrium에서 무료 공연이 열려서 쇼핑하고 잠시 공연을 보러 갔다.
링컨 센터 White Light Festival 10주년 특별 공연이었는데 컨템퍼러리 음악이었는데 청중들이 좋아해 놀랐다. 가끔씩 컨템퍼러리 음악 공연을 감상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낯설고 어렵기만 하는데 뉴요커들 음악 감상 수준이 남다르다.
링컨 센터 화이트 라이트 페스티벌은 유료 공연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보고 싶지만 멀기만 하는 공연들. 문화 예술의 도시 뉴욕에서는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공연이 열리지만 내가 어떻게 보고 싶은 공연을 모두 보겠어. 주로 무료 공연을 감상하고 가끔 메트 오페라와 카네기 홀 공연을 본다. 나의 한계 안에서 최고로 멋진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나의 숙제다.
화이트 라이트 페스티벌 축제는 10주년이지만 우리 가족이 롱아일랜드에 살 때는 맨해튼 문화생활은 꿈도 꿀 수 없이 멀기만 했고 공부하고 일하던 무렵은 맨해튼이 뭔지도 몰랐지. 뉴욕에 도착한 첫해 크리스마스 무렵 한인 관광버스 타고 맨해튼 투어 할 때는 지리도 낯설기만 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내게 뉴욕은 다정한 친구로 변했어. 대학원 공부하던 시절 매주 맨해튼에 가서 공연을 감상하는 젊은 강사도 만났는데 브루클린 뱀에서 폴 사이먼의 공연을 보러 간다니 얼마나 그녀가 부러웠는가 몰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도 매일 맨해튼에 가서 공연을 보니 세월의 힘이 놀랍지 않은가. 세월은 어느 날 우리가 알지 못한 곳에 데려다준다.
물론 나의 대학시절은 세상은 정말 캄캄했어.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돈으로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음반을 사서 자주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던 시절. 해외여행도 일반에게 허용되지 않은 때라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수 십 년 세월이 흘러가니 세상이 달라져 가고 있다.
저녁 8시 줄리아드 학교에서도 하프시코드 공연이 열려서 난 잠깐 화이트 라이트 페스티벌 공연을 보고 줄리아드 학교에 갔다. 11월의 색채가 느껴지는 하프시코드 연주가 참 좋다. 삶은 참 복잡하고 힘들지만 음악을 감상하는 순간은 천국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내게 음악은 평생 귀한 친구가 되어주니 얼마나 좋아.
목요일 아침 아파트 지하에 가서 세탁도 했다. 30년이 더 지난 낡은 세탁기를 아파트 전체가 공동으로 사용하니 늘 비어있는지 부담이 되고 혹시 세탁기가 멈춰 버리면 어떡하나 걱정도 된다. 하얀 서랍에 든 25센트 동전을 세면서 약간 걱정도 했다. 가끔 낡은 세탁기가 내 동전을 말없이 먹어버린 사태가 발생하니까. 무사히 세탁을 마쳐서 기분이 좋았다. 어쩌다 보니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현실에도 감사함으로 살아야 하는 뉴욕.
브런치를 먹고 낙엽이 수북이 떨어진 길을 걸으며 사색을 하면서 맨해튼에 가려고 시내버스 타러 길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