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4일 토요일
뉴욕의 안개비 내리는 겨울 아침 풍경은 아름다웠다. 귀한 풍경이라서 그럴까. 안개 낀 풍경은 흔하지는 않다. 안개 하면 헤세가 떠오른다. 고독하게 지내는 뉴욕 생활에 더더욱 생각나는 시다.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헤세
기이하여라. 안개속을 거니는 것은!
모든 나무 덤불과 돌이 외롭다.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한다.
누구든 혼자이다.
나의 삶이 아직 환했을 때
내게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다.
이제, 안개가 내려,
더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을, 떨칠 수 없게 조용히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갈라놓는
어둠을 모르는 자
정녕 그 누구도 현명치 않다.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삶은 외로운 것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누구든 혼자이다.
아들과 함께 오랜만에 호수에 가서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전보다 더 많은 기러기떼, 청둥오리 떼, 하얀 갈매기떼들을 보았다. 고즈넉한 호수 풍경을 바라보며 휴식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나무에 걸린 은빛 별들도 바라보고 붉은색 산타 할아버지 모자를 쓴 북극곰을 보고 웃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어찌 겨울나무 위에 걸쳐 있는지. 누가 은색 별들을 겨울나무 가지 위에 걸었을까. 새해가 열렸지만 플러싱 주택가는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고 방실방실 웃는 산타할아버지 얼굴 표정만 봐도 행복한 시기다.
어제 새벽 딸을 배웅하고 집에 돌아와 한숨 자려다 전화를 받고 깨어나 식사를 하고 늦은 오후 맨해튼에 갔다. 나의 1차 목적지는 맨해튼 어퍼 이스트 사이드 뮤지엄 마일에 있는 누 갤러리.
독일 표현주의 작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 방문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놀랐다. 매달 첫 번째 금요일 저녁 시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데 한 시간 이상 동안 기다렸으니 입장료는 완전 무료는 아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기다린 시간이 나의 누 갤러리 입장료. 작년 가을 내내 공연을 보느라 자꾸 특별 전시회 방문을 미루다 곧 전시회가 막을 내려 방문했다. 호주머니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가 추운 겨울날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메트 뮤지엄 근처에 있는 누 갤러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가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작품 전시회를 볼 수 있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특별 전시회가 좋아서 사랑을 받는 곳이다. 누 갤러리에 있는 카페 사바스키 Café Sabarsky는 인기 많은 곳인데 두 자녀랑 딱 한 번 방문했는데 비엔나커피로 명성 높고 창가로 센트럴파크 풍경이 보여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 스타일은 아닌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특히 소시지를 싫어하는 나랑 취향이 안 맞고, 커피값과 음식값이 결코 저렴하지 않은 것에 비해 만족도가 떨어졌다. 각자 취향을 존중하는 세상이고 내 취향이 그렇다는 말이지만 사바스키는 뉴욕에서 인기 많은 카페, 가끔 특별 공연도 열리나 티켓값이 꽤 비싸 공연을 볼 기회가 없었다. 돈 많은 귀족처럼 근사한 옷을 입고 근사한 카페에서 공연을 감상할 상황이 아니니 그림의 떡이야. 뉴욕 부자들 어찌 쳐다보고 살아. 내 형편에 맞게 살자. 새해도 검소하게 살면서 감사함으로 즐겁게 기쁘게 살자.
누 갤러리 밖에서 1시간 이상 기다려 피곤하고 서부로 떠나는 딸을 배웅한 날이라 더더욱 피곤한데 뮤지엄 정상 입장료 주고 방문하기는 어렵고 마지막 기회라 어쩔 수 없이 기다려 입장했다. 외투와 가방은 짐 보관소에 맡기고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키르히너 특별전을 관람했다. 계단 벽에 붙은 그의 초상화 사진을 보고 그가 참 섬세한 사람이란 것을 짐작했다.
방문자들 가운데 노인들도 많고 젊은 층도 많았다. 평소와 달리 독일어 구사하는 방문객이 꽤 많았다. 심지어 지팡이를 들고 전시회를 보는 노인도 있으니 놀랍다. 거동이 몹시 불편한데 미술관에서 전시회 보는 사람들 보면 놀랍지. 방문객들이 꽤 많아 키르히너 생애에 대해 작은 글씨로 적힌 벽은 자세히 보지도 못했다.
그가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지낼 적 창작한 작품들을 보면서 20년 전 베를린과 드레스덴에 여행 갔던 추억도 떠올랐다.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도 보고 뮤지엄에도 가고 서점에도 방문했으면 좋았을 텐데 여행 가이드가 안내한 곳만 줄줄 따라다녀 특별한 기억도 없는 베를린. 그래서 내 기억 속 베를린 풍경은 아주 밋밋하다. 단 하나 기억난 게 있다면 베를린 장벽 그라피티. 그때 생에 처음으로 그라피티를 봤다. 먼 훗날 뉴욕에 와서 사니 그라피티가 흔한 예술인데. 드레스덴은 알지도 듣지도 못한 도시인데 아름다웠던 도시란 기억만이 남아있다. 그때는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 여행 추억을 조금 담았을 텐데 너무나 갑자기 뉴욕에 오게 되니 작은 이민 가방에 꼭 필요한 짐을 우선순위로 챙기다 보니 한국에 두고 왔다.
두 자녀랑 지난번 플라자 호텔 푸드 홀 카페에서 이야기 나눌 때도 우리가 유럽 여행 다닌 지 20년이 지났구나 하면서 세월이 유수 같다고 했다.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뉴욕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영락없이 소설과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산다. 현실은 복잡하지만 마음은 자유롭고 꿈처럼 살려고 노력을 하지. 대서양 하늘 위를 나는 하얀 갈매기처럼.
담배 피우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서 그가 애연가란 것을 짐작했어. 모마에서 그의 대표작 <베를린 거리 풍경> 그림을 보면서 내가 베를린에 방문했던 당시 느낌과 너무나 달라서 놀랐는데 알고 보니 창녀를 담은 그림이었어. 유럽 여행할 때 베를린 사람과 파리 사람 느낌은 너무나 달랐다.
인기 많은 누 갤러리 방문객들이 너무나 많으니 난 잠깐 전시회를 보고 1층으로 내려와 숍 잠깐 구경하고 밖으로 나왔다. 숍에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있지만 구입은 하지 않았다. 내가 전시회를 보고 누 갤러리 밖으로 나온 시각도 추운 겨울날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메트 뮤지엄 근처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할머니가 30분 이상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셨다. 나도 한참을 기다린 뒤에 시내버스에 탑승했는데 영어권이 아닌 여행객들이 시내버스에 탑승했는데 뉴욕 교통 카드가 뭔지도 모른데 친절한 기사는 요금도 받지 않더라. 가끔 친절한 기사도 있다.
시내버스를 타고 달리다 5번가 풍경을 바라보고 플라자 호텔을 지나 모마 근처에 내렸다. 이제 곧 록펠러 크리스마스트리도 구경하지 못할 것이니 다시 한번 혼자서 보고 싶은 마음에 갔는데 작년 연말 크리스마스트리 분위기보다 훨씬 더 썰렁해져 놀랐다. 크리스마스트리 분위기도 시시각각 변하나 봐. 삭스 핍스 백화점 Saks Fifth Avenue 레이저쇼도 다시 한번 보고 브라이언트 파크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플러싱으로 돌아왔다. 새해 1월 첫 번째 금요일 새벽부터 상당히 무리하니 몸이 무너지는 거 같아도 참고 누 갤러리 특별전도 감사함으로 관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