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5일 토요일
뉴욕에 겨울비가 억세게 내린 구정날. 맨해튼에서 구정 특별 행사와 소호에서 로어 이스트사이드로 옮긴 국제 사진 센터가 새로 오픈한 커뮤니티 날이라 방문할까 계획을 세웠지만 다 포기했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 메트 뮤지엄과 구겐하임 뮤지엄 등 토요일 기부금을 내고 입장할 수 있으나 역시 포기하고 줄리아드 학교와 맨해튼 음대에서 종일 음악 감상을 할 수 있을 텐데 조용히 지냈다. 겨울비 오는 날 뮤지엄에 방문해서 조용히 그림을 감상해도 좋을 텐데 나의 에너지는 대서양 아래로 잠수했다. 뉴욕은 정말이지 멋진 놀이터. 문화면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맨해튼에 가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으니까. 아주 저렴하게 또는 무료로 즐기는 것도 셀 수 없이 많으니까.
맨해튼에서는 매일 수많은 이벤트가 열리지만 내 마음과 컨디션에 따라 머나먼 님이 된다. 뉴욕에 아무리 오래오래 살아도 뉴욕 문화에 관심이 없으면 장님처럼 산다. 실제 너무 바쁜 리듬으로 살다 보니 뉴욕 문화를 잘 모른 이민자들도 많고, 1주일에 100시간 일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시간이 없어서 즐기지 못하기도 한다.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내려 5번가 북 카페는 가는 길 비바람이 거세게 부니 우산 들기도 힘들 정도. 도로 바닥은 스키장처럼 미끌미끌하니 엉덩방아 찍을까 봐 새색시처럼 조심조심 걷다 북 카페에 도착.
오랜만에 공룡 바리스타를 만나 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어갔다. 얼마 만에 간 것인지 기억조차 없다. 전에는 거의 매일 방문하다가 작년 가을부터인가 뜸해졌는데 언제가 마지막 방문이었는지 기억이 새하얗게 되었다. 서점에 가면 난 늘 너무너무 작다.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읽어도 도저히 읽을 수 없을 거 같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매일 가서 조금씩 읽어야 하는데 왜 점점 게을러지는 걸까.
뉴욕에서 맞는 구정은 늘 쓸쓸하다. 한국에서는 명절이 되면 함께 모여 식사도 하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물론 음식 준비하는 며느리 입장에서는 숨 돌릴 틈이 없이 바쁘니 명절이 싫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명절이 되면 일부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한다고. 고운 한복을 입고 세배를 드리는데 뉴욕 생활에서는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무에서 시작해 오래오래 참 어렵고 힘든 길을 걷다 드디어 넓은 평수 아파트에 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자녀 조부모님께 중형 아파트를 구입해 드렸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결혼 후 아무리 복잡하고 힘들어도 매주 시댁에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두 자녀 할아버지는 우리가 뉴욕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하늘나라로 먼 길을 떠나셨다고 연락이 왔다. 세상을 하직하기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 차례 종합 병원에 입원하시는 동안도 가까이 사는 내 몫이 아주 컸다. 그때 두 자녀는 특별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있었다. 혼자서 몇 가지 역할을 해야 했는지 몰라.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사는 입장에서 한국에 계신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뉴욕에 살아도 1년에 최소 2번 정도 고국을 방문할 정도로 여유로우면 좋을 텐데 현실은 어렵다. 구정 전날(한국 시간으로 구정날 아침)에 친정 엄마에게 전화만 드린 게 전부다. 엄마가 좋아하는 특별한 선물이라도 보내면 좋을 텐데 여기서 생존하기도 무척 버겁고 힘든 나날들.
삶은 항상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모른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그때마다 난 전쟁터 병사처럼 싸웠다. 끝도 끝도 없는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갇혀 지낸다. 평생 편안한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내가 침묵을 지키면 난 언제나 천국에 산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웃는다. 평생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는지. 어린 두 자녀 데리고 뉴욕에 와서 교육시키는 것은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힘들고 도전적인 일이었다. 40대 중반 어린 두 자녀 데리고 뉴욕에 가서 공부한다고 하니 모두가 불가능한 꿈이라고 했다. 얼마나 힘든 줄 모르고 뉴욕에 왔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너무나 아득하고 어떻게 그 위태로운 길을 걸었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하루하루가 불바다 속에 몸이 타오르 듯 어려운 일이 많았다. 어렵고 힘든 현실 가운데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