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뉴욕에 올 때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어린 두 자녀 데리고 왔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와 문화와 지리도 낯선 뉴욕은 내게 괴물도 그런 괴물이 없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은 고통의 시작이고 끝도 끝도 없는 고통을 지불하고 나서야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뉴욕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거나 날 도와줄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좀 더 가벼웠을지 모르나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뉴욕에 줄리아드 학교가 있다는 것만 알고 왔다. 그러니까 센트럴파크, 타임 스퀘어, 브루클린 다리 등도 몰랐다. 한국에 있을 때 '이민'이란 단어도 몰랐다. 뉴욕에 와서 슬픈 이민자들의 삶을 보니까 '이민'이 뭔지 뼈저리게 느낀다. 지금이야 인터넷 세상이 되어가니 컴퓨터를 켜면 무한한 정보를 흡수할 수 있다. 세상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두 자녀가 한국에서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특별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딸은 엄마가 경제적으로 힘들 거라고 레슨을 중지했고 아들만 계속 레슨을 받았다. 아들이 맨해튼 음대 예비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아들이 소속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갔다. 당시 대학원 공부 중이고 맨해튼이 아닌 롱아일랜드에 사니까 맨해튼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 참 힘들었지만 아들이 연주하니까 찾아갔다. 뉴욕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과 뉴욕 문화가 다름을 실감했다. 예비학교 학생들 연주가 참 좋았다. 공연이 끝나고 새벽에 집에 돌아왔고 공부하는 중이라 말할 것도 없이 바쁘기만 했다. 하필 다음날 내 시험과 겹치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맨해튼 음대 오케스트라 공연이 일반에게 무료로 오픈한 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후 줄리아드 학교도 마찬가지란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맨해튼 음대에서만 1년 약 700여 개 공연. 일부는 유료이지만 아직 무료 공연이 더 많고 마스터 클래스 역시 무료로 오픈한다. 줄리아드 학교도 마찬가지다.
내게 뉴욕 문화에 대해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뉴욕은 모두 바쁘게 사니까 다른 사람 삶에 관심도 없고 간섭도 하지 않고 투잡, 쓰리잡, 포잡을 갖고 일하는 사람도 꽤 있다. 정말이지 바쁜 리듬으로 사는 뉴요커들. 각자 원하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의 꿈도 다르고 당연 삶도 다르다.
처음에 아들 바이올린 지도 교수님 아드님이 카네기 홀에서 연주한다고 하는데도 공연을 보러 가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 가정 형편도 어렵고 무료 공연도 아니고 맨해튼에서 멀리 떨어진 롱아일랜드에 사니 그림의 떡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가니 이제는 카네기 홀에서 열리는 대가들의 공연을 보러 간다. 카네기 홀에 가면 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놀랍기도 하다.
아들이 맨해튼 음대에서 공부를 하다 무료 공연 정보를 알게 되고 그 후로 차츰차츰 뉴욕에서 많은 공연이 열린 것을 알아가게 되고 어릴 적부터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내게 뉴욕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매일매일 지하철을 타고 가면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니까. 정말 마법 같은 순간이 있다. 대가들의 연주를 감상할 때면 특히 그렇다. 그런데 특별한 공연은 항상 열리지 않는다.
올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카네기 홀에서 자주 베토벤 음악 공연을 한다. 생각할수록 위대한 베토벤. 음악가가 귀가 들리지 않음에도 곡을 작곡했다. 얼마나 위대한가! 자신의 한계와 투쟁을 했던 베토벤 너무나 멋져. 그의 곡도 정말 아름답다.
대학 시절에 자주 베토벤 <황제> 피아노 협주곡을 들었다. 올겨울 베토벤 황제 곡을 우연히 9번 들었다. 맨해튼 음대에서 열리는 피아노 대회에 가니까 베토벤 곡을 연주했다. 그날 8명의 학생이 참가했는데 7명 학생 연주까지 듣고 줄리아드 학교에 갔다. 그 후 맨해튼 음대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갔는데 프로그램을 보니 맨 마지막 곡이 베토벤 <황제> 피아노 협주곡. 그날도 내 몸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으나 황제 피아노 곡 연주를 들으려고 마지막까지 객석에 머물렀다. 그 후 카네기 홀에서 커티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갔고 그날 연주 프로그램에 베토벤 곡이 포함되었다. 그래서 9번이나 듣게 된 셈이다.
뭐든 그렇지만 알면 알 수록 더 좋다. 라이브 공연을 9번이나 감상했으니까 내 귀는 황홀해졌다. 9번 연주 가운데 커티스 음대 교수 Jonathan Biss 연주가 가장 좋았다.
카네기 홀 웹사이트에는 프로그램 곡을 알려줄 때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줄리아드 학교와 맨해튼 음대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미리 베토벤 곡을 연주할 거라 알고 방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음악을 좋아하니까 그냥 찾아가서 우연히 베토벤 <황제> 피아노 곡을 들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과거가 현재로 연결되고 우연히 일어나는 경우도 참 많다.
매일매일 스케줄을 만들어 맨해튼에 가서 다양한 행사를 보는 것은 열정 없이 불가능하다. 내가 원하는 스케줄을 만들어 줄 로봇도 없고 내 대신 내 일을 할 사람은 세상에 없기에.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찾는다.
한국 영화감독 봉준호 역시 오스카 상을 수상하게 되리라 미처 몰랐다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수상을 했는지 모른다. 세상에 쉬운 길은 없다. "학문에 왕도가 없다"는 속담,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속담 역시 세월이 아주 흘러가니 이제 몸으로 느낀다. 중학교 시절 자주 보던 속담이 수 십 년 세월이 흘러가서 느끼게 되니 얼마나 놀라워. 뉴욕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하루하루가 도전이고 아직도 애벌레 시기를 거치고 있는가 모르겠다. 더구나 날개 하나 부서진 몸으로 사니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를 견딘다. 그래도 희망과 꿈을 갖고 산다. 내 한계 내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면서.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내 한계를 벗어나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뉴욕은 위를 쳐다볼 수도 없다. 세상의 부자들 어찌 쳐다보고 살아.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항상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