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9일 목요일 흐림
하늘도 잿빛 마음도 잿빛. 새벽에 봄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잠이 들었다. 겨우내 언 땅에 촉촉이 내리는 봄비가 그리 반갑지 않은 것은 마음이 평화롭지 않아서일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슬픈 뉴스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코로나 19로 지구촌이 총탄 없는 전쟁터로 변하고 있는데 언제 막이 내릴지 모르니 더 답답한 순간.
음악을 사랑하는 팬에게는 뉴욕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선물이다. 링컨 센터 메트(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고 카네기 홀과 뉴욕필 등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고 줄리아드 학교와 맨해튼 음대에서 매일 수많은 공연을 볼 수 있어서. 그런데 카네기 홀도 메트도 공연이 전부 취소가 되었으니 정말 잔인한 봄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미술관과 뮤지엄들과 갤러리 역시 전부 문을 닫았으니 내게는 지옥 같은 뉴스다.
3월 12일 뉴욕 거버너 쿠오모가 500명 이상 함께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메트와 카네기 홀 공연장은 수 천명을 수용하니 당연 공연이 취소될 수밖에. 줄리아드 학교에서 가장 먼저 3월 말까지 공연이 취소된다는 소식을 알려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5월까지 공연이 취소된다고 하니 몹시 슬펐다.
메트 오페라 공연 취소 소식은 수입이 줄어들 테고 연이어 직원들의 해고 소식이 들려온다. 3월 말 후부터 직원들 급여가 일시적으로 중지된다는 소식. 그러나 의료 보험 혜택은 준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인가 모르겠다. 렌트비 비싼 뉴욕에서 당장 급여가 나오지 않으면 어찌 살까 한숨짓는 사람들도 많을 테고. 메트의 직원 해고 소식은 다른 단체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수입이 없는데 직원들 급여를 준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지! 자선 단체가 아니니까. 메트 오페라 경영이 무척 어렵다고 들었다. 오페라 제작비가 무척 많이 드니까. 어쩌다 지구촌이 이리 흙빛으로 변하고 있을까.
뉴욕은 한국보다 늦게 코로나 19 감염자가 발생하기 시작. 아무것도 모른 난 전염병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구촌으로 확산하고 있어 공포에 물들어가는 사람들. 뉴욕주 확진자 숫자가 5천 명에 이르니 결코 작지 않다.
한국과 미국은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한국 의료 보험 제도는 미국보다 백만 배 더 좋은 거 같다. 미국 의료의 선진 시스템은 돈 많은 귀족들이 이용할 수 있고 가난한 서민들은 비싼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의료 보험비 비싸니 보험도 없는 사람도 꽤 많은 미국.
우리 가족 초기 정착 시절 두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의료 기록을 제출해야 하는데 예방접종이 부족하다고 해서 플러싱 한인 의사에게 예방주사 1회 비용이 무료 100불. 두 명이니 200불. 난 숨이 막히고 의사는 웃더라. 의료 보험이 없으니 예방 주사 비용도 너무 비쌌다. 눈물이 주르륵 흐를 뻔. 의료 보험 없는 경우 며칠 병원에 입원하면 수천 만원도 나오고 1주-2주 지내면 1억 나오는 거 아무것도 아닌 미국 의료 시스템. 절망이지 절망. 미국에서 아프면 죽는다.
자본주의 나라의 꽃이 피는 나라가 미국 아닌가. 부자 나라라고 알려졌지만 빈부차는 양극으로 나뉘고 상당수 매달 렌트비와 식품비 해결도 어렵다고 말한다.
메트에서도 직원을 임시적으로 해고했지만 의료 보험 혜택은 준다고 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의료 보험 없으면 병원비는 얼마나 비싸.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만 보일 수도 있지만 미국이 지상 천국도 아니고 이민자로서 이방인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아픔은 헤아리기 어렵다.
한국보다 천 배 이상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버티고 견디면서 뉴욕에 살고 싶은 이유는 공연 예술 문화가 너무나 좋은 것도 이유, 또 다른 이유는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 뉴요커가 사랑하는 뉴욕의 혼이 흐르는 센트럴파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그리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도 크다.
그런데 전염병으로 모든 게 중지가 되니 뉴욕이 뉴욕이 아니다. 내 마음은 그네를 타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할지 하루에도 수 천 번 나 자신에게 물어보나 아직도 답을 구하지 못했다. 어렵고 힘들 때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으니 더 답답하다.
어제 카네기 홀 맞은편에 있는 The Nippon Club에 전시회 보러 갔는데 직원이 전날 갤러리 문을 닫았다고 하니 슬펐다. 빌딩에는 예쁜 군자란 꽃이 피어 하늘에 계신 친정아버지가 생각났다. 어릴 적 정원을 가꾸고 군자란을 키우셨다. 어렵고 힘든 뉴욕 상황에서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한결 가벼울 텐데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평생 혼자의 힘으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살았으니 아직 버티고 있나 모르겠다. 무에서 시작하는 삶은 참 어렵기만 하더라. 단 하나도 그저 쉽게 이뤄지는 것은 없더라. 노고와 땀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완성해 간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매일매일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하다 보면 밝은 세상이 열릴까.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희망의 등불을 켜고 산다.
목요일 아침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떠오르게 하는 아파트 지하에 내려고 세탁을 했다. 낡고 오래된 공동 세탁기를 사용하니 늘 마음이 불편하지만 세탁을 하면 기분이 좋다.
흑사병으로 유럽 1/3 인구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코로나 19는 얼마나 많은 사망자를 가져올지. 지구촌은 모두 패닉에 빠졌다. 매일 눈만 뜨면 들려오는 슬픈 뉴스를 듣고 있으면 가슴속에서 눈물이 흐른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이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다. 3월 초 요요마, 카바코스, 엠마누엘 엑스 공연이 카네기 홀에서 세 번이나 열렸고 난 세 번의 공연을 다 볼지 아니면 골라서 볼지 상당히 고민하다 모두 봤는데 돌아보면 좋은 결정이었다. 지금은 공연을 보러 갈 수도 없으니까. 초록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에 오페라 공연도 자주 보려고 했는데 5월 공연까지 전부 취소가 되었으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꽃피는 봄이 오면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여행을 떠나려 했는데 나의 계획은 하나하나 물거품으로 변하고 있다. 아, 슬픈 봄! 잔인한 봄!
마법을 걸어 지구촌 전염병을 사라지게 하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