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화장실 세면기 수리하니 행복하다.

by 김지수

2020년 11월 29일 일요일


IMG_5703.jpg?type=w966 뉴욕 퀴즈 플러싱 주택가 11월 풍경


세상에 이럴 수가! 건조기에 넣은 세탁물을 찾으러 아파트 지하에 내려가 뚜껑을 여는데 하얀색 이어폰이 보이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한 순간. 어쩌다 사고를 쳤을까. 좀 더 주의를 했더라면 사고를 치지 않았을 텐데 귀한 이어폰이 고장 났다. 둘 모두 같은 브랜드 이어폰을 사용하니까 아들 건지 딸 건지 구분이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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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은 늘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한국에서는 집안에서 세탁기를 사용하니 편한 시간에 언제든 세탁을 하니 좋았는데 뉴욕은 집에 세탁기가 없는 집이 많다. 그래서 빨래방을 이용하거나 아파트 공용 세탁기를 사용하는데 지하에 달랑 세탁기 6대 건조기 6대가 있으니 마음이 가볍지 않다. 혹시 누가 사용하면 난 사용할 수 없으니까. 가끔은 고장 난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으니 더 답답하지. 거기에 세탁하려면 은행에 가서 동전을 교환해야 하고 머리 무겁게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탁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은데 세탁하러 갈 때마다 내 마음은 블루. 아들과 함께 4개의 빨래 가방에 세탁물을 담아 후다닥 달려가 세탁기에 넣고 돌아왔고 30분 후 다시 지하에 내려가 건조기로 옮겼을 때도 하얀색 이어폰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 알고 보니 딸의 이어폰. 딸이 호주머니에 이어폰을 넣었는데 난 그만 보지 못해 실수를 했다. 세탁하러 가기 전 모든 호주머니를 뒤져봐야 하는데 빨리 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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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정말 앓던 이가 빠졌다. 아파트 화장실 세면기가 막혀서 슈퍼를 불러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뤘다. 비싼 렌트비를 매달 꼬박꼬박 내는데 슈퍼에게 부탁하기가 참 어렵다. 남에게 부탁하는 일은 항상 어렵기만 하다.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진즉 처리했을 텐데. 오전 11시경 전화를 하니 받지 않았다. 1시간 후 다시 전화를 하니 오후 1시경 집에 온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슈퍼는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껏 나의 경험으로서는 그렇다. 아들은 슈퍼가 깜박 잊었는지 모른다고 하니 다시 전화를 했다. 5분 후 온다고 했지만 1시간 후 연장을 들고 나타났다. 시간 개념이 제로야. 바이올린 레슨 받을 때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는데. 딱 그 시간에 맞춰 도착해 레슨 받는 일을 10년을 넘도록 했다. 그러니 시간 개념이 저절로 생기는데 나와 다른 사람도 참 많아.



IMG_5700.jpg?type=w966 플러싱 주택가도 홀리데이 장식으로 꾸민 집이 많다.



한국에서는 아파트에 살면서 한 번도 세면기가 막힌 적이 없었는데 뉴욕은 다르다. 1940년대 완공된 낡은 아파트는 가끔씩 슈퍼를 불러야 한다. 슈퍼의 얼굴에 장밋빛 미소가 피면 좋겠는데 반대다. 그러니 마음이 무거워 전화하기가 망설여지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린다. 바로 수선할 줄 알았는데 쉽게 일이 끝나지 않았다. 세면기의 범인은 다름 아닌 머리카락이다. 왜 세면기에서 머리를 감지 않은데 머리카락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머리카락에 발이 달렸나. 정말 이상해. 슈퍼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팁을 드렸다. 여기저기 고칠게 참 많지만 꼭 필요한 경우 슈퍼를 부른다. 아파트 창틀도 헐렁헐렁. 그러니 찬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어쩌다 보니 영화 속 주인공. 한국에서 외국 소설 읽을 때도 들어본 적이 없는 현실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가족. 그럼에도 참고 견디고 사는 뉴욕의 열악한 현실. 꼬박꼬박 비싼 렌트비를 내는데 수리가 필요한 경우 슈퍼를 부를 때도 망설이는 것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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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예쁜 단풍을 보며 파랑새 노래 들으며 장을 보러 한인 마트에 갔다. 세일하는 달걀과 세일하는 유자차와 세일하는 스페인산 단감과 연어를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시내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시내버스는 안 와서 할 수 없이 터벅터벅 걷는데 너무 무거워 아들을 부르고 싶은데 꾹 참고 집까지 걸어왔다. 달걀과 유자차가 생각보다 더 무겁다. 정착 초기 뉴욕에 도착해 차가 없던 시절은 고인돌 시대 같았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 매일 하루는 눈물로 시작 눈물로 끝났어. 그때도 걸어서 장을 보러 다녔는데 아들이 처음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 오래오래 걸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는데 달걀이 깨져버려 속이 상했다. 아들은 달걀인 줄 모르고 그냥 무심코 바닥에 내려놓았는데 하필 달걀이었다. 달걀 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차가 있다면 더 편리할 텐데 차가 없으니 불편한 점도 많다. 그래도 참고 산다. 한국에서는 20대 중반부터 운전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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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말까지 핀 장미 대단해.


아파트 슈퍼가 떠난 뒤 아들과 함께 동네에서 산책을 했다. 새들이 좋아하는 붉은 열매와 장미꽃과 예쁜 단풍을 볼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곧 11월 달력을 넘겨야 하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장 보고 세탁하고 화장실 세면기 수리하고 글 쓰고 파랑새 노래 들으며 산책하며 하루가 지나갔다. 밀린 일기가 아직도 많은데 세 편의 글쓰기를 하니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든다. 매일 너무 바쁘니 고민할 시간 조차 없다. 내일은 내가 좋아하는 11월의 마지막 날. 고독한 뉴요커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감사 감사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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