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만난 두 자녀 아빠와 만 7년을 교제하고 결혼했다. 무에서 시작하니 무척이나 힘들었다. 보통 사람은 가난이 주는 선물이 뭔지 다 알 것이다. 그는 늘 바빴고 집에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찾아와 작별하고 뉴욕에 떠나왔지만 나도 한 때 사랑받는 며느리였다.
결혼 후 매주 토요일마다 두 자녀 조부모님 댁에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방문하지 않은 날이 거의 드물었다. 아이 아빠 직업은 사회적으로 부러움을 받았지만 결혼 초기 그의 급여는 30만 원이 채 안되었다. 당시 백화점에서 피에르 가르뎅과 입생 로랑 브랜드 가디건 하나에 17만 원 정도이었지만 사다 주었다.
참 오래도록 긴긴 과정을 마치고 군대를 마치고 어느 날 선후배들과 함께 사업을 시작한다고 천문학적인 현금을 단 1주일 만에 가져오라고 명령했을 때도 나의 몫이었다. 시댁은 단 돈 1원도 빌려주지 않았고 친정아버지가 필요한 자금의 절반을 빌려주셨다. 나머지는 매일 눈만 뜨면 은행에 찾아가 사업 자금을 빌리려고 은행장을 만났다. 거래가 없으면 대출이 안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만 석 달 만에 필요한 돈을 마련해 사업을 시작했다.
하필 IMF가 찾아와 매달 갚아야 하는 은행 이자가 하늘처럼 불어만 갔다. 삶은 눈물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눈물을 먹고 산다. 어렵고 어려운 세월이 지나 드디어 사회적 눈높이와 비슷해지는 위치에 다다르자 6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때까지 적어도 15회 이상 이사를 했고 한국에 포장 이사가 유행가기 전에는 직접 짐을 쌌다.
이사를 하자마자 주위 사람들의 시신이 달라졌다.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의 눈빛이 무서워 피하고 싶었다. 몇 달 되지 않아서 시댁을 위해 우리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 내에 중형 아파트를 구입해드렸다. 남들은 시댁이나 친정에서 수 십억 받기도 하고 어떻게든 유산을 받으려고 난리더라. 실제 수 십억 받는 지인들도 주위에 있었다. 20대 후반 결혼해 귀족처럼 살면서 돈이 남아 시댁을 위해 아파트를 구입한 것도 아니었다. 결혼 생활이 너무 복잡하고 두 자녀 교육으로 항상 바쁘고 가난하니 멋진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 먹는 호사도 누리지 않았다. 아끼고 또 아끼고 살았다. 날 위해 펑펑 돈을 썼으면 남을 위해 쓸 돈은 한 푼도 없었을 것이다.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집에 선물이 들어오기도 했고 그때마다 시댁에 갖다 드렸다. 바다에서 막 잡은 싱싱한 생선을 나도 좋아했지만 연세 든 부모님이 먼저란 생각에 항상 선물을 했다.
또 과거 80년대 후반 90년대 초 유자는 지금과 달리 비싼 과일이었다. 선물로 유자 박스를 받았다. 유자차를 만들어 시댁에 갖다 드렸다. 아들만 넷 둔 교육계 집안이었고 세 명의 동서에게도 유자차를 선물했다. 받은 사람은 아주 작지만 반대로 준비한 사람에게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유자차를 만들기 위해 병과 설탕을 구입하고 도마에 놓고 작게 썰어서 유자차를 만든 과정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손목과 팔이 너무 아팠다. 한 박스를 통째로 유자차를 만들어 선물했다. 그때 셋째 동서가 왜 막내며느리가 사랑받는지 알겠다는 말을 했다.
교직에 종사하다 두 자녀 양육을 위해 사직서를 제출하니 퇴직금을 받았다. 시댁을 위해 멋진 카펫이 쿠션을 백화점에서 구입해 선물했다.
매년 명절이 되면 며느리들은 음식 준비로 늘 바빴다. 종일 전을 부치고 나물을 만들고... 가장 힘든 거 가운데 하나가 소파 다듬기였다. 다듬어진 파를 구입하면 몇 푼 안될 텐데 늘 시어머니는 손질이 안된 파를 구입하셨다. 다른 동서들은 모른 척했다. 소파 다듬기가 의외로 피곤했다. 늘 시어머니 옆에서 도와 드렸다. 그때 난 두 자녀 특별 레슨으로 1초가 하늘만큼 귀하던 시절. 레슨 준비가 무척 힘들다. 어린 두 자녀는 시간 안에 준비할 몫이 있고 늘 엄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엄마는 매니저 역할을 한다. 그렇게 바쁘고 귀한 시간 쪼개서 시댁에 가면 파를 다듬었다.
내가 사직서 제출하기 전 딸을 출산하니 누가 자녀를 키울지 복잡했다. 친정 엄마 건강도 안 좋아 반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육아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시어머니가 비싼 육아 비용을 듣고 아까워 한 번 키워보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큰 동서는 내게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면 안 된다고 했다. 왜냐고. 할머니가 아이를 키우면 늙는다고. 시어머니는 큰 동서 아들을 몇 년 동안 키우셨는데 막내아들 딸은 키우면 안 된다고. 시어머니는 단 하루 내 딸을 돌보셨는데 전화가 왔다. 아이가 잠을 안 자니 힘들어 돌볼 수 없다고. 그래서 아이를 데려와 다른 분에게 맡기고 출근했다. 약혼 시절에 소형차를 구입했으니 차도 있었지만 여자니 운전하면 안 된다는 보수적인 남자와 함께 사니 운전을 하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통근했다. 하루 왕복 4시간이 소요되었다. 삶은 항상 쉽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 차례 병원에 입원하셨다. 시댁에서 가까이 사는 막내며느리 몫이 가장 컸다. 멀리 사는 동서들 입장과 달랐다. 셋째 동서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시댁을 방문하곤 하는데 어느 날 밤 11시경 시댁에 도착해 "내일 뉴질랜드로 이민 가요."라고 하니 대소동이 났다. 말할 것도 없이 시어머니와 셋째 며느리가 싸웠다고 하더라. 셋째 아들은 서울대와 카이스트 졸업하고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잠시 살다 부인과 자녀만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
어느 날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가자고 결심하고 남들이 궁궐이라 부른 아파트를 떠나 좁은 월세 아파트로 옮겼다. 내가 가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난 세상에 정신병자로 소문이 났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법정 소송을 1년이나 하고 재판이 끝나 유학 준비를 하고 뉴욕에 왔다. 대학 시절부터 수 십 년 동안 뒷바라지하니 정신 병자로 만들어 한없이 슬펐지만 내가 세상도 모르고 남자도 모른 죄였다. 뒤돌아보지 않고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가출할 때 두 자녀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댁을 위해 나의 최선을 다했다. 사랑받는 막내며느리 가출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 내 마음도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학 시절 만난 그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학교 시절에 전공 교재 복사비가 없다면 달려가 주고 버스비가 없다면 달려가 주고... 긴긴 과정 뒷바라지하고. 천문학적인 사업 자금 마련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적 위치에 오를 때까지 나의 최선을 다했지만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뉴욕으로 떠나와 40대 중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세상이 부러워 한 위치에 다다라 빚 갚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뉴욕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하루하루는 눈물로 시작하고 눈물로 끝이 났다. 두 자녀교육과 날 위해 뉴욕에 왔다. 평생 바보 멍청이처럼 살고 의무와 책임을 다했으니 나도 내 인생 살아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가진 거 없지만 늘 행복하게 산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길을 천천히 걷는다. 집에 TV도 없고 세탁기도 없다. 행복은 마음에서 온다. 비록 가진 거 없지만 내 마음은 명품 아닌가. 마음이 명품이라서 비싼 명품 브랜드를 한 번도 구입하지 않았다. 명품 브랜드를 부러워한 적도 없다. 두 자녀 아버지 평생 뒷바라지 해 성공하게 만들었고, 두 자녀 특별 교육했고(바이올린 특별 레슨이 무척 힘들었다), 시댁 위해 중형 아파트 구입해드렸다. 평생 의무와 책임을 다했으니 이제 남은 생은 날 위해 살고 싶다. 비록 내 커리어를 위해 살지 않았지만 내 의무를 다했고 화려했던 지난날을 돌아보지도 않고 내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지난 날 기억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다.
요즘 상처 받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어 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글을 쓴 이유는 삶이 궁금해서. 어디서 내 삶이 시작했고 현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 나의 최선을 다해도 삶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더라. 난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의 뜻. 웃으며 행복하게 살자. 자유로운 영혼은 매일 행복을 찾아 나비가 되어 맨해튼에서 난다.
우리 가족이 뉴욕에 온 세월은 아직 십 대다. 사춘기라서 질풍노도의 시기다. 미래가 어디로 열릴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처럼 내게 운명이 찾아와 내 삶을 폭풍의 바다로 만들었다. 폭풍 속에서 눈물 속에서 보석 같은 하루를 만들어 간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산다.
브런치 일기는 고독한 뉴요커의 생존 일기다. 아무도 없는 낯선 땅에서 고아처럼 사는 우리 가족의 무한 도전 기록들. 평생 방황하다 운명을 피하지 못해 뉴욕에 왔는데 대학 시절 꿈꾸던 도시더라. 삶이 참 신비스럽다.
코로나 전 뉴욕이 사랑스러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