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1 일요일
말없이 찾아와 말없이 떠나는 세월. 어느새 1월 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몸과 마음을 흔들어버리는 강추위가 찾아와 10년 만에 창고에 든 전기난로를 꺼내 켜 놓으니 다음날 날아올 폭풍 전기세가 미리 염려가 된다. 냉동고로 변한 집에서 우리 가족도 눈사람으로 변할 거 같아 난로를 안 켤 수도 없다. 궁궐도 아닌 작은 오두막 전기세도 왜 그리 비싼지!
가난은 눈물인가. 누군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어서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다고. 참 슬픈 세상이다. 세상도 모르고 돈과 권력과 파워도 모른 바보 같은 난 왜 세상 한 복판에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와서 혹독한 고통을 주었을까. 미리 알았으면 뉴욕에 오지 않았을까. 천국과 지옥의 두 가지 색채를 보고 느끼는 뉴욕. 세계 문화 예술의 도시라서 문화면은 천국이지만 현실은 소설 속에서 본 적이 없는 왕지옥. 물론 지금은 뉴욕이 잠들어 버려 공연 예술 축제도 모두 멈춰버리고 코로나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니 슬프다.
대학 시절부터 날 키운 것은 꿈과 사랑. 두 가지가 없다면 아름다운 세상도 보지 못하고 아픔 속에서 시름시름하다 흙으로 돌아가겠지. 얼마나 더 오래 뉴욕에서 버틸 수 있으련가 모르는 불확실한 시기. 운명이 날 뉴욕에 데리고 왔으니 운명이 날 어디론가 데리고 가겠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열어간다. 지옥 속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기쁨.
변함없이 눈을 뜨면 호수에 간다. 날씨가 추워 장갑을 끼어야 하는데 사진을 찍으려면 불편하니 그냥 가는데 손이 시려 죽을 거 같은 날. 그럼에도 사진을 찍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보고 아이스하키가 떠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스하키를 하고 있는 사람들.
동네 공원에서 아이스하키 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든 혹독한 계절이지만 겨울이 주는 즐거움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영화 속에서 아이스하키 경기장이 나오면 내 가슴이 뛰었다. 그때는 한국이 몹시도 가난한 시절이라서 영화를 보고 대리 만족했을까. 참 멋지게 보인 스포츠였는데 난폭해서 사고도 많고 실명도 된다고 하니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역시나 다르다. 운동하다 실명되면 얼마나 슬퍼. 운명일까. 이탈리아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도 축구 경기를 하다 시력을 잃었다지. 좋은 점도 참 많지만 과격한 운동은 위험하다. 오랜만에 그의 노래나 들어볼까.
수년 전 처음으로 메트에서 공연한다고 하니 저렴한 티켓 사려고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실제 공연은 별로였다. 라이브 공연이 어려운 점이 많다. 워낙 명성 높은 음악가라서 그의 얼굴만 본 것으로 만족한 사람도 있지만 난 껍질(명성) 보다는 알맹이(실력)를 더 중요시하니 실망이 컸다. 메트 박스 오피스에서 25불일 거라 생각하고 티켓을 구입했는데 가장 싼 티켓이 60불? 인가. 저렴한 티켓은 반환도 안된다. 깜짝 놀라서 직원에게 왜 이리 비싸요? 하니 메트에서 관리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다고. 맨해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매년 홀리데이 시즌 공연이 열리나 티켓값이 무척 비싸다. 그래서 포기하고 메트 러시 티켓은 25불일 거라 혼자 짐작했는데 역시나 내 짐작은 엉터리였다. 그리 형편없는 공연인 줄 미리 알았다면 좀 보태서 차라리 오페라 3편을 보고 말지.
라이브 공연이 어려우니 보첼리 말고 다른 음악가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아들의 아이돌 힐러리 한 카네기 홀 공연도 그랬다. 아들이 그녀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를 무척 좋아하는데 카네기 홀 공연은 실망이 커서 아들과 난 공연이 끝나기도 전 일찍 홀을 떠나 집에 돌아왔다. 그날 카네기 홀 청중들은 그녀를 국빈 대접하더라.
아이스하키 연습하는 거보다 이상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온몸이 눈사람이 되어가는데 예쁜 풍경을 담으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얼마나 손이 시리던지! 참아야 하는 순간.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멋진 풍경이니까. 갈매기 춤추는 호수에서 아이스하키 연습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본 풍경이니 얼마나 즐거웠을까. 신났다. 마음이 쿵당쿵당 뛰어서 하늘로 올라갈 뻔했다.
잠시 후 날 놀라게 한 또 하나의 풍경이 시작되었지. 동장군이 찾아와 겨울 철새도 먹이가 없는지 한 마리가 먹이를 찾으면 먹을 수 없도록 옆에서 괴롭히니 동물 세상이나 인간 세상이나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고 느꼈다. 생존 걱정 없이 편히 사는 사람과 가난에 허덕이며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 배고픈 갈매기가 괴성을 지르는데 참 슬펐다.
곧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니 플러싱 주택가에 하트 장식이 보인다. 조금만 꾸미면 집 분위기도 달라진다. 밸런타인데이 실내 식당 영업을 다시 오픈한다고. 좋아하는 뉴욕 레스토랑 위크 축제도 끝나버렸다. 맨해튼에 산다면 이용했을 텐데 맨해튼과 플러싱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호수에서 집에 돌아왔지만 냉동고처럼 추워 갑자기 새우튀김이 먹고 싶은데 냉장고에 새우가 없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고구마튀김을 만들어 먹었다. 추운 날 구수한 튀김이 입속에 들어가니 조금 살만했다.
저녁 무력 거실 전구가 카바레 불빛처럼 깜박깜박거렸다. 곧 수명이 다 하려나 봐. 창고에 든 여분의 전구를 찾느라 에너지를 소비했다.
아, 힘든 사진 작업. 몇 장만 찍어야 하는데 바보처럼 자꾸 셔터를 누르니 고생길이다. 하루가 2억 시간이라면 괜찮을 텐데 24시간. 읽어야 할 책이 날 기다리는데 언제 읽을까. 1월 몇 페이지를 읽었을까. 읽어야 하는데...
밤에는 재밌는 메디치 영화를 보았다.
2월의 첫날 눈폭풍이 온다는 일기예보. 정말 무섭다. 비상 양식도 챙겨야 하는데 늘 잊어버린다. 난 현실이 아니라 이상 속에서 사는 사람인가. 딸은 엄마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혹시 전기가 나가버리면 난리가 나지. 2012년 10월 말 지옥의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강타했을 때도 전기 공급이 끊겼다. 갑자기 고인돌 시대로 돌아가 지냈지. 아들은 다른 거 몰라도 전기는 안 끊겨야 한다고...
산책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