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눈폭풍

by 김지수

2021. 2. 1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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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엔 그림. 눈폭풍이 온다는 일기예보대로 눈보라가 휘몰아쳤고 아파트 뜰 고목나무가 우아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으니 마치 왕비나 된 듯 멋졌다. 따뜻한 유자차를 끓여 마시고 예쁜 창밖 풍경을 보며 겨울을 좋아하는 친구를 생각했다.




소식이 뚝 끊긴 지 10년도 더 지났다. 말러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림도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친구는 겨울에는 스키를 타러 콜로라도에 갔는데 코로나 시절 무얼 하고 지낼까. 내게 환한 미소 지으라 말하던 그. 힘들게 지내다 보니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살았다. 하얀 눈 펑펑 내린 날 롱아일랜드 낫소카운티 뮤지엄 오브 아트(Nassau County Museum of Art)에 갔는데 하필 문이 닫혀 돌아섰다. 우리 가족이 살던 제리코에서 상당히 가까워 좋던 미술관에 아들과 함께 샤갈 특별전을 보러 갔다. 노란 해바라기 가득 핀 뜰이 무척 예쁜 미술관이 가끔 생각나는데 플러싱으로 이사 온 후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차 없이 생활이 불가능에 가까운 롱아일랜드. 10년도 넘은 낡은 차를 팔아버리니 롱아일랜드는 머나먼 님으로 변했다.


하얀 눈 펑펑 내리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다름 아닌 영화 <닥터 지바고>. 전쟁과 사랑과 운명에 대한 대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아름다운 영화. 주제곡 <라라의 테마>를 좋아해 오래전 자주 듣곤 했는데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영화배우 오마 샤리프의 커다란 눈동자가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였던가. 영화를 본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도 흐리다.





추운 날 갈비찜 요리가 최고다. 갈비와 감자와 무와 양파와 당근과 마늘과 파를 넣어 푹푹 오래 끓인 갈비찜을 무척 사랑하는 아들은 맨해튼 최고 레스토랑과 맛이 별 차이가 없다고. 물가 비싼 레스토랑에서는 갈비 1조각이 5불. 오래전 연구소에서 일할 적 만난 연구원은 맨해튼 명성 높은 한식당에 식사하러 가니 갈비 두 조각이 15불+세금+팁이라고. 참 비싼 물가지.


수년 전 아들과 난 링컨 스퀘어에서 열리는 Winter's Eve 축제에 가서 하얀 천막에서 맛있는 갈비 한 조각을 사 먹었는데 5불이라고. 추운 겨울날 줄을 서서 오래 기다려 "하나만 주세요"라고 하니 직원이 "정말요"라고 물었지. 돈 걱정 안 할 형편이라면 더 많이 주문했을 텐데 내 입장이 보통 사람과 다르니 늘 지출에 신경을 쓰니 한 조각만 달라고 했는데 역시나 맛이 특별했다. 바로 그 맛과 엄마 요리가 다르지 않다고 하니 기분이 좋다. 따뜻한 음식을 먹으면 에너지가 난다.


설거지를 하고 창밖을 바라보며 호수에 갈까 말까 생각하다 긴 장화를 신고 겨울 외투를 입고 모자와 목도리를 쓰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는데 눈 속에 내 발이 파묻혔다. 눈폭풍이 와도 인도를 치워놓으면 조금 더 나은데 인도가 사라져 버려 내 무릎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그래도 매일 가는 호수가 보고 싶어 마음먹고 나왔는데 그냥 집에 돌아가기 아쉬워 계속 걷는데 이러다 눈 속에서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떤 곳은 무릎이 아니라 허벅지 부분까지 눈 속에 파묻혔다. 아... 한숨이 나오는데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어쩌다 달리는 차량이 보이는데 태워 달라고 부탁하고 싶으나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도 어려우니 그냥 참고 호수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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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무릅쓰고 호수에 찾아간 건 뭘까. 날 기다리는 연인도 없는데. 아니 호수가 나의 연인인가. 가긴 갔으니 호수 풍경을 렌즈에 담았지만 집에 돌아와 사진을 보니 흐리다. 눈폭풍이 휘몰아치는데 휴대폰에 습기가 들어가서 그런가.



하긴 수년 전 안네 소피 무터가 카네기 홀에서 공연할 때 그날도 뉴욕에 하얀 눈이 펑펑 내려 센트럴 파크에 가서 사진 찍는데 휴대폰 작동이 멈춰버려 포기하고 돌아서 카네기 홀 옆 스타벅스 카페에 가서 따뜻한 커피 마시고 몸을 녹이며 쉬었다. 그날 하필 카네기 홀 공연 티켓을 분실해 대소동을 피우다 어렵게 직원이 준 티켓을 받아 하늘 꼭대기 높은 좌석에 앉아서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을 들었다. 그때는 카네기 홀 저렴한 티켓을 모르던 때. 대학 시절부터 자주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서 꼭 보고 싶은 마음에 20불짜리 공연 티켓을 구입해서 혼자 카네기 홀에 갔던 날. 사소한 지출은 줄이지만 꼭 보고 싶은 공연이라면 마음먹고 지출을 하는 나. 그래서 오해도 받기도 한다. 돈이 무척 많아서 그런다고. 다른 거 아끼고 아껴 꼭 하고 싶은 거 하는데 남들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돈이 남아서 취미 생활한다고 오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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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도보로 약 15분 거리인데 1년이나 된 듯 멀게만 느껴졌던 눈보라 휘몰라 치던 날. 꼭 호수를 봐야만 했을까. 겨울 철새도 사라진 호수는 고즈넉했다. 전날 갈매기들이 먹이로 싸우던데 그들도 눈폭풍이 온다는 걸 미리 알았을까. 그날처럼 사나운 갈매기 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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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으로 덮인 눈밭 속에서 무사히 집에 도착했지만 이미 난 하얀 눈사람이 되어있었다. 모자와 목도리와 외투와 내 몸이 꽁꽁 얼어버렸으니까. 살다 처음 경험했다. 나무 계단을 올라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말렸다. 정말 눈 속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순간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하얀 눈처럼 돈이 하늘에서 쏟아져 가난으로 힘든 사람들이 돈 걱정 안 하면 좋을 텐데 갈수록 먹고살기 힘든 세상. 빈부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창밖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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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은 눈폭풍으로 시작했구나. 하얀 눈 오는 날 첼리스트 요요마 연주로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을 듣고 싶다.


한국에서 지낼 적 EBS에서 우연히 그의 연주를 듣고 첼로 선생님 댁에서 요요마 자서전을 빌려다 읽었는데 그때는 내가 뉴욕에 올 줄 미처 몰랐다. 참 오래전 일이다. 그때 난 대학 시절 사랑하던 바흐 무반주 조곡을 레슨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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