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10 수요일
어제 구름 속에 숨어버린 겨울 해님이 밝은 미소를 지어 나도 모르게 호수에 세 번이나 산책을 가고 말았다. 뉴욕에 눈폭풍이 찾아온 후로 아들과 하던 조깅도 멈추웠는데 오랜만에 1만 5 천보 이상을 걸으니 몸이 피곤했다.
이른 아침 동틀 때 멋진 하늘을 바라보고 아침 10시경 지나 혼자 호수에 찾아가니 온화한 겨울 해님이 날 기다리고 있어서 행복했다. 겨울 해님이 항상 미소 짓지 않으니 해님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추운 겨울이라 산책하는 사람은 드물어 더 조용했다. 집으로 돌아올 무렵 하늘에 하얀 갈매기 몇 마리 해님 주위를 맴돌며 날 환영했다. 요즘 겨울 철새가 귀하니 더 반갑다.
점심을 먹고 딸과 함께 호수에 갔는데 오후 1시경 미팅이 있다고 딸이 말하니 잠시 산책하고 집에 돌아오려는데 꽁꽁 언 겨울 호수에서 귀한 풍경을 보았다. 작은 거북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거북이 발자국을 따라 거닐고 싶은데 호수 한가운데서 기어가는데 내가 호수 중앙에 들어가긴 걱정이 되어 멀리서 바라보았다. 거북이 귀가 아주 좋은지 내가 딸에게 " 어머 거북이야"라고 말하자 거북이가 멈춰 우리가 하는 말을 듣나 보다 혼자 짐작했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라 신났다.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미팅이 취소되었단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하고 한인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구정이 다가오면 쓸쓸해진다. 물가도 치솟고 한국과 달리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고 찾아올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하다. 힘든 이민생활에 참고 견디고 사는데도 명절이 찾아오면 날 괴롭힌다. 그러니까 명절병이나. 한국에서는 설날에 예쁜 한복 입고 세배도 하고 음식 준비하느라 무척 바쁘고 가족끼리 만나면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도 있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미국에 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니 고아 같다. 고구마, 갈비 약간, 두부, 고등어, 파 등을 구입해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왔다. 차가 없으니 무거운 짐을 들고 걸으니까 장 보기가 불편하다. 매일 먹고사는데 냉장고는 금세 코스모스처럼 홀쭉해지니 텅텅 빈 냉장고를 채워야 하니 장을 보러 가긴 하지만. 매일 무진장 먹고사나 봐.
오후 4시경 혼자서 세 번째 산책을 갔다. 아직 하얀 눈이 녹지 않아서 미끄러운 곳도 있어서 평소 15분 정도 거리가 30분 이상 소요되고 걷기가 불편한데도 호수에 갔다. 겨울바람도 부니 춥기도 하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으면 시린 겨울날 호수에 도착하니 하얀 갈매기떼가 돌아와 반가웠다. 괴물 눈폭풍이 찾아오기 전날 괴성을 지르던 하얀 갈매기. 그 후로 한 동안 갈매기 떼는 보이지 않았고 가끔 하늘에서 갈매기 몇 마리가 날고 있었다. 하얀 갈매기가 나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다. 그림 같은 호수 풍경을 보면 내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마음에 행복을 차곡차곡 쌓으니 마음 부자가 되는 걸까.
겨울날이라 추워서 호수에 산책하러 가기 쉽지 않은데 겨울 해님이 날 유혹해 세 번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다른 선물을 받았다. 오전 10시경은 겨울 해님, 정오 무렵은 거북이, 오후 4시경은 하얀 갈매기 떼. 늘 같은 장소에 있는 호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니 신비롭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늘 같은 풍경으로 보일 것이다.
늦은 저녁 무렵 원로배우 윤정희의 치매 소식을 들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했던 영화배우. 어느새 그녀가 77세라고. 수 십 년 전 백건우 독주회를 보러 가서 멀리서 그녀를 보았다. 세월이 무섭게 달려간다.
치매라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사는 것'도 어렵고 힘든데 이제는 '죽는 것'에 대해 고민할 시기다. 나의 노후도 걱정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아프다면 날 돌볼 사람도 없는데 얼마나 슬픈 일일까. 건강하게 사는 것이 축복이다. 몸과 마음도 건강해야 한다. 마음의 쓰레기는 미루지 말고 버려야 한다. 마음 안에 쌓아두면 괴물로 변하니까. 내게도 슬픈 일이 무진장 많았는데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면 진즉 병이 났겠지. 마음의 쓰레기는 즉시 버려야 산다.
힘든 이민 생활이라서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글쓰기는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까. 코로나 전에는 다양한 공연 전시회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지금은 산책을 하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글을 쓰면서 지내고 있다.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을까.
문득 롱아일랜드 치매 알츠하이머 전문 양로원이 생각났다. 제리코 집에서 가까운 오이스터 베이에 있던 양로원에서 만난 노인들은 잘 지내고 계실까. 아마도 하늘나라로 먼 여행 떠났을 거 같다. 사립 양로원이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고. 메디케이드 메디케어 같은 정부 보험은 받지도 않아서 랍스터를 잡아 파는 분은 어머님 양로원 비용을 대기 위해 세 척의 배를 팔았다고 했던가. 양로원 근처에 사니 매일 어머님 뵈러 온다고. 신사 같다고 아들이 펭귄이라 별명을 지어준 할아버지는 나중 알고 보니 정신과 의사로 일하다 은퇴하셨다고. 변호사, 검사, 교장 선생님, 의사 등 정말 다양한 노인들을 만나 미국 사회에 대해 조금씩 들었다. 마지막 하늘로 떠나기 전에는 과거 행복했던 추억만 기억하는 알츠하이머와 치매환자들. 아들이 양로원에서 발런티어 하며 슬프기도 했지만 참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양로원에서 발런티어 할 때 한국 6.25 전쟁에 참가했던 분들도 만났다. 그때는 미국 국민 모두 징병 대상이어서 한국에 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