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18 목요일 눈폭풍
아침부터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예쁜 풍경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2월 내내 눈폭풍이 찾아와서 불편한데 차가 없으니 제설 작업할 필요도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했다. 차가 있으면 폭설이 내리면 제설 작업해야 하니 불편하다. 집도 차도 없으니까 그럴 필요는 없지만 차는 없어도 예쁜 집은 있으면 좋겠는데 이민 1세와 1.5세 삶은 하루아침에 안정되지 않는다.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고.
얼마 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사는 분이 외국 살이 28년이 되니 이제 운명에 순응하고 살겠다고 적은 내용을 블로그에서 읽었다. 대학 시절 그분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해 혼자 힘으로 일본에 유학 가서 공부하고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하고 작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부모 도움으로 유학을 해도 외국에서 자리 잡기 힘들다고 하는데 혼자 힘으로 유학하고 피렌체에 살면서 일도 하니 얼마나 대단한지!
운명을 탓하며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운명과 싸우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행운도 모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스로 노력해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해보지 않으면 어려운 줄 모르지만 실제 해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뼛속 깊이 느낀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만 단 하나도 쉬운 게 없는 이민자 삶.
하얀 눈송이가 입속으로 들어가 사르르 녹고 내 발은 눈 속에 파묻여 발이 시러운데도 계속 걸었다. 하얀 눈 속에 핀 겨울 장미와 국화꽃도 보면서 거닐다 정착 초기 우리 가족이 살던 롱아일랜드 딕스 힐 떠오르게 하는 주택을 바라보았다.
고백하면 딕스 힐 저택은 궁전 같은 곳이 많다. 두 자녀 매일 학교에 픽업할 때 주택을 바라보면 궁전 같아서 놀라곤 했다. 거기에 비교하면 플러싱 주택은 그냥 평범한 수준이다. 뉴욕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으니 인터넷에서 어렵게 학군 좋은 집을 구했다. 그 집이 딕스 힐에 있었다. 미국 여행을 한 적도 없어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데 학군이 좋다고 하니 계약을 했던 곳.
두 자녀가 중고교 시절을 뉴욕에서 시작했는데 뉴욕 상류층 자녀들과 함께 공부하니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한국과 비교가 안 되는 부잣집들. 미국 부자 차원이 다름을 처음 느꼈던 곳이다. 롱아일랜드 공립학교 수준도 사립학교만큼 좋고 영화 같다. 학생들은 벤즈, 폭스 바겐, BMW를 몰고 학교에 등교한다. 왜냐면 롱아일랜드는 차 없이 생활하기 어렵고 상류층 가정은 자녀들에게 럭셔리 차를 사준다.
상류층 자녀들은 개인 튜터랑 공부하면서 수업과 시험 준비하니 얼마나 삶이 다른지! 이제 막 유학 온 가정과 상류층 차이는 극과 극보다 더 큰 차이가 있을 거다. 그런 학생들과 경쟁하며 대학 입시를 치르니 죽을 고생을 했다. 난 내 공부도 지옥 같으니 두 자녀 공부에 신경 쓸 겨를도 없고 돈도 없으니 도움이 안 되었다. 함께 유학 오니 한국 나이는 사라지고 1세도 아닌 0세가 된다. 두 자녀도 0세 나도 0세.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니까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늘 같은 장벽을 넘고 넘고 넘어야 겨우 숨 쉬고 산다.
뉴욕 추위가 정말 무섭다는 것도 뉴욕에 도착한 첫해 가을 처음 알았다. 책에서 추워 죽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가 경험하지 않아서 잘 몰랐다. 주인이 난방을 잘 안 해줘 다투고 결국 6개월 만에 제리코로 이사를 했다. 제리코 역시 최고 학군이지만 딕스 힐 보다 더 보수적인 경향이 있고 아시아 출신 학생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잘 모르니 백인 학생들 많은 학교가 좋은 줄 알았는데 장단점이 있었다. 딕스 힐은 너무너무 부잣집들이 많아서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 같고 난방 문제로 한바탕 싸우고 나서 이사를 했다.
매일 찾아가는 호수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는데 잠시 후 몇 사람이 나타나 나처럼 좋은지 웃으며 사진을 찍더라. 하얀 갈매기 한 두 마리 잠시 하늘을 날다 멀리 사라졌다. 겨울 철새는 뉴스도 안 보고 어찌 눈폭풍이 왔는지 알까.
며칠 전 처음으로 창문 반사 이미지를 보고 피카소 그림 같아서 다시 찾아갔는데 어느새 빨간색 하트 대신 초록색 클로버 장식이 보였다. 밸런타인데이가 지나고 3월 성 패트릭 데이가 다가오니 장식을 바꾼 부지런한 주인. 아주 오래전 롱아일랜드에 살 때 양로원에서 발런티어 할 때 디렉터가 내게 초록색 의상을 입고 오라고 하니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특별한 날이었다. 두 자녀와 함께 공부하니 무척이나 바빴는데도 발런티어도 하면서 지냈다. 매주 일요일이면 찾아가 노인들을 도와 드렸다. 그렇게 조금씩 미국 사회에 노출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 맨해튼 월가에서 일하다 파킨슨 병으로 양로원에서 지내던 중년 유대인 남자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몇 개 외국어를 구사했던 분 안부도 궁금하다. 책과 음악을 무척 사랑하니 양로원 거처에도 책이 성처럼 쌓여 있었다. 모닝커피를 양로원 노인들에게 만들어 줬는데 얼마나 까다로운지! 나랑 처음으로 말을 했던 이탈리아 출신 할머니 방 침대에 꽃다발이 놓여 무슨 일인가 했는데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아들이 만들어준 맛있는 스무디 먹고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김치찌개도 다시 만들어 먹고 하얀 눈밭을 거닐며 새들의 합창 들으며 행복했다. 호주 오픈 준결승전에서 조코비치가 이겨 결승전에 올라가는데 올해 누가 우승을 할까. 뉴욕 시간으로 새벽에 경기를 하니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