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2 월요일
"엄마 스파게티 하지?"
"어떻게 알아?"
"엄마 마음을 알아."
아들이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우리 가족은 한식을 사랑하고 특히 김치 요리를 좋아하지만 가끔 스파게티도 즐겨 먹는다. 오랜만에 미트볼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미트볼 하면 뉴욕 정착 초기 힉스 빌 IKEA에서 먹은 스웨디시 미트볼과 그때 추억이 떠오른다. 이케아 근처에 가면 미트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국 입맛 취향이라서 그럴까. 기대를 하고 먹었는데 별로였다. 유럽식 미트볼을 안 좋아한다.
정착 초기 텅 빈 집에 채울 가구를 구입하려고 힉스빌에 갔다. 한국 짐을 그대로 가져온 분도 있는데 우리 가족은 이민 가방 몇 개만 들고 왔으니 뉴욕 도착한 첫날 베개도 이불도 없이 바닥에 누워 라면 끓여 먹고 잠을 잤다. 차도 없는 곳에서 생활이 불가능한데 뉴욕 도착하자마자 차를 구입할 수도 없으니 초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고 주인이 직장 가는 길 우리 가족을 이케아에 내려주고 퇴근길 픽업하러 왔다. 하루 종일 이케아에서 어떤 가구를 살까 고민하며 서성거렸다. 에어컨 바람이 얼마나 강하던지 결코 잊을 수 없다.
침대 두 개와 책상 한 개와 의자와 서랍장 등의 최소 가구를 창고 같은 곳에서 꺼내 계산대까지 옮기는 것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 내게는 무척 힘들었는데 사춘기에 접어든 딸이 그 힘든 일을 다 했다. 가격은 무척 저렴해 환상적이었지만 스스로 조립해야 하는 노동의 대가가 엄청 컸다. 매일 눈만 뜨면 가구를 조립하기 시작해 해가 질 때까지 했다. 한 달이 걸렸다. 그때 추억은 잊으래야 잊을 수 없다. 날 고통으로 빠뜨린 것이 어디 한두가지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부자라면 돈으로 해결된 일들도 무척 많았다. 갖지 않은 자는 갖는 자와 삶이 다르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삶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어려운 환경에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잘 견디는 두 자녀가 늘 고맙다. 부러진 날개만 아니라면 지옥 같은 고생을 하지 않을 텐데 새로운 문은 고통과 눈물과 열정으로 열리다 다시 금세 닫히곤 반복했다. 그때마다 포기했더라면 난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자본주의 세상 갖지 않은 자의 존재는 바람만큼 가볍다.
월요일 아침 일찍 아파트 지하에 가서 세탁을 했다. 대개 1주일 정도면 세탁물이 쌓인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지하에 들어가면 기분도 찜찜하다. 아무도 없는 지하에서 세탁을 하려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세 번 간다. 세탁 가방 들고 세탁기에 넣으려고, 다시 건조기에 옮기려고, 마지막은 세탁물 찾으러.
건조기에 든 세탁물을 찾으러 가는데 아래층 할머니를 만났다. 알래스카 복장을 하는 할머니는 세탁물을 주섬주섬 세탁기에 넣고 있었다. 인사를 해도 받지 않은 아래층 노인. 롱아일랜드에서 살다 플러싱으로 이사 올 때도 소란하다고 불평했던 노부부. 좁은 오두막에 가구도 거의 없다. 서랍장 옮기는 소리도 듣기 싫다면 궁궐에 가서 살지. 왜 서민 아파트에 사나. 이사할 때 소음 없이 할 수 있나. 아들 방 선풍기 소리도 크다고 불평을 하니 할 말을 잊게 한다. 아래층 부부 싸움하는 소리도 가끔 노래를 부른 소리도 들려온다.
우리 집 소리만 들리겠는가. 한쪽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피곤하다. 거꾸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 좋을 텐데... 어느 나라 출신인가 늘 궁금했는데 노부부 우편물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와서 그리스 출신이란 걸 알았다. 전직 직업이 뭘까 몹시 궁금한데 한 번도 묻지는 않았다. 아니 물을 수 없는 괴팍한 성격의 할아버지다. 아들이 전화하는 소리도 들린다고 아파트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며 찾아오곤 하면서 경찰에 신고한다고 하더니 그 후 정말 경찰이 수차례 찾아와 쾅쾅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로 찾아왔어요?"
"경찰 부르지 않았어요?"
"아니요."
참 어이없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딱 한번 아주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아래층 화장실에 누수가 된다고 화장실 사용을 자제해 달다고 부탁했다. 그때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서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말도 없이 우리 집 화장실 수리한다고 문을 열고 들어와 하루 종일 작업을 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으니 얼마나 불편했던가. 아파트 슈퍼 부인에게 화장실 사용해도 되냐고 물으니 한마디로 거절했다. 한국과 참 다른 문화에 놀라던 게 한두 번이나. 미리 경고를 하든지 아니면 이웃집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막무가내로 찾아와 수리를 했다. 혼자서 종일 땀 뻘뻘 흘리고 작업하는 인부에게 수박을 접시에 담아드렸더니 감사하다고 했다. 힘든 이민 생활인데 인부 따님이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했던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뉴욕에서도 의사란 직업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함을 느꼈다.
만나면 인상 찌푸리는 아래층 할머니를 만나 반갑지는 않았지만 세탁을 마치면 기분이 좋다. 오전 세탁하고 식사 준비하니 금세 시간이 지나고 맛있는 스파게티 먹고 설거지할 때 하얀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에 100% 눈이 내린다고 하더니 역시나 눈이 내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데 아무래도 우산을 써야 할 거 같은데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부서진 우산이 눈에 띄어 그냥 들고 호수에 갔다. 날씨가 한국과 달라서 그런지 우산이 오래가지 않는다. 폭풍 속에 걷다 보면 우산은 어느새 고장이 난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 맞으며 걸으니 기분이 좋았지만 상당히 추웠다. 별 기대 없이 호수에 도착했는데 겨울 철새들이 날 환영했다. 환영의 의미는 날 좋아해서가 아니라 먹이를 주길 바랬던 모양이다. 야생 동물에게 먹이를 주면 안 된다고 하고 평소 빈손으로 다니는데 하얀 눈 오는 날 먹이를 구하지 못해 구슬피 우는 겨울 철새를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호수는 마치 내 개인 정원 같았다.
얼마 후 한 사람이 왔는데 겨울 철새에게 먹이를 주려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으려고 미끼를 던졌다. 실망한 겨울 철새들. 다시 얼마 후 나타난 방문객 역시 사진을 찍으려고 왔는데 겨울 철새는 사람이 도착하면 구세주인 줄 알고 환영하다 실망한 눈치였다. 참 견디기 힘든 겨울.
빨리 겨울이 가고 봄이 와야 할 텐데 뉴욕의 2월은 눈폭풍으로 시작해 눈폭풍으로 끝나려나. 2월 내내 하얀 눈이 펑펑 내린다. 차도 집도 없으니 눈 내리는 날 제설 작업하지 않아도 되니 가벼운 마음으로 낭만을 즐긴다. 계속 함박눈이 펑펑 내리지는 않았다. 내가 호수에 다녀오는 동안만 내리다 비가 내렸다. 아들은 춥지 않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겨울 철새가 불쌍하더라고 하니 농담으로 텍사스 시장처럼 강한 자만 살아남을 수 있어라고 하니 웃었다. 아들이 겨울 철새만 배고픈 게 아니라 세상에는 가난으로 힘든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다고.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이 오면 좋을 텐데 갈수록 빈부차는 커진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말처럼 사회는 거대한 병원 같다. 온갖 바이러스와 투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