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통 소동, 오랜만에 첼시 갤러리, 줄리아드 공연...
2021. 12. 15 수요일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노래가 생각난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퀸즈 식물원 장미 정원에 가고 싶었다. 새벽에 깨어나 책을 읽다 새벽하늘도 보고 서둘러 식사 준비를 하고 시내버스를 타고 퀸즈 식물원에 방문했다. 요즘은 입장료가 무료. 난 주로 일요일 아침에 방문했고 중국인들이 함께 운동을 하는 것을 보곤 했는데 수요일 아침에도 중국인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함께 뭉치는 것을 참 좋아하는 민족.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려는데 아들이 화장실 변기통이 이상하다고 말해 확인을 하니 고장이 났다. 다른 거 몰라도 변기통과 욕조와 부엌 등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이 고장이 나면 미룰 수 없어서 바로 슈퍼에게 전화를 했다. 대개 전화를 안 받기도 하지만 당장 수리해야 할 거 같아서 음성 메지지라도 남길 셈이었는데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약간 낯설었다. 알고 보니 슈퍼 아들이었다. 변기통에 문제가 생겨 언제 수리해줄 수 있냐고 묻자 바로 달려와 고마웠다. 하지만 바로 수리하지 못했다.
난 식사 후 맨해튼에 갔다. 대신 아들에게 슈퍼 전화번호를 주고 혹시 안 오면 연락해 보라고 말했다. 맨해튼 어퍼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보고 지하철역에 가는데 거리에서 빵과 커피를 파는 상인이 날 보고 인사를 했다. 가끔씩 커피를 사 먹곤 하는데 오늘은 그냥 지나치려는 순간 날 보고 인사를 하니 나도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을 타려고 내려가다 마음에 걸려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커피를 달라고 부탁했다. 거리에서 파는 커피는 약간 저렴하지만 카페와 달리 종이컵 뚜껑이 불편하다. 조심했는데 그만 실수로 겨울 외투에 커피가 엎질러져 얼룩이 져서 속이 상했다.
백만 년 만에 첼시 갤러리에 방문했다. 지난가을 뭐가 그리도 바빴나. 아님 게을렀을까. 가끔씩 방문해도 좋을 텐데 미루고 미루다 홀리데이 시즌이라 갤러리가 곧 문을 닫을 거 같아 힘을 했다. 간 김에 가고시안 갤러리 전시회도 보려고 했는데 하필 문이 닫혀 있었다. 수 백개의 갤러리들이 밀집된 곳이고 가고시안 갤러리 아니더라도 많은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다. 천천히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보고 허드슨 야드 홀리데이 장식도 볼 계획이었는데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분명 일기 예보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했다.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 미드타운으로 돌아왔다. 아지트에서 커피 마시고 책을 읽으려는 순간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슈퍼 아들이 몇 차례 변기통을 수리하러 왔지만 고치지 못했다고. 당장 고쳐야 하는데... 아들이 유튜브를 찾아보고 해결책을 생각했는데 슈퍼 아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부품을 들고 찾아와 수리를 했다고. 오전에 연락해 저녁 식사 시간에 해결했다. 천만다행이었다.
갑작스럽게 변기통이 말썽을 부릴 줄 누가 알았을까. 1940년대 완공된 낡고 허름한 아파트는 영락없이 소설 속 배경 같다. 로또만 당첨되면 센트럴 파크 옆이 아니라도 맨해튼으로 이사를 가고 싶은데 운이 없는 편이다. 남들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은 불행도 자주자주 찾아와 날 흔들어버린다. 자주 여기저기 말썽을 부린 아파트. 당장 떠나고 싶다. 지하 세탁기는 30년 이상이 되었다고 했나. 정말... 참고 견디고 그냥 산다.
아들이 고등학교 시절 공부했던 맨해튼 음대에서 저녁 공연을 볼 예정이었는데 다시 확인하니 공연 스케줄이 안 보였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아님 취소가 되었나. 잘 모르겠다. 어쨌든 공연을 보기 위해 맨해튼에서 기다려 그냥 집에 돌아가기 아쉬운 마음에 맨해튼 음대 대신 줄리아드 학교에서 바이올린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음악이 참 좋다.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니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이 하얀 눈 녹듯 사라졌다. 마지막 크라이슬러 작품은 듣지도 않고 지하철을 타고 타임스퀘어 역으로 가서 플러싱에 가는 익스프레스에 타고 달리는데 갑자기 지하철이 멈췄다. 분명 멈추지 않았다면 내가 원하는 시각에 시내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는데... 왜 멈춰... 밤에는 시내버스가 자주 운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차가운 바람 맞고 기다렸다. 이럴 줄 미리 알았다면 크라이슬러 작품도 듣고 나올 텐데...
집에 도착하니 아들이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할아버지가 찾아와 우리 가족이 소란을 피우니 경찰을 부르겠다고 협박을 하셨다고. 아들이 어이없어 부르려면 불러라고 맞장구를 쳤다고.
내가 새벽에 깨어나 책을 읽곤 하지만 책 읽는데 뭐가 소란하겠는가. 노인 부부 대화 소리도 들려오고 코고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래도 우린 한 번도 찾아가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씩 찾아와 불평을 하곤 하신다.
우리들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들이 참 많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며 살자. 다 지나가고 좋은 날도 오겠지.
안 오면 어떡해? 할 수 없지.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희망 없이 하루하루 어떻게 견디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