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소장 Nov 17. 2023

세종의 애착인형

황희 일기 

14살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나이었다. 


음서를 통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를 보고 나서는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하던 그때, 나는 첫 실직을 했다. 고려가 망한 것이다.   

   

다른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조선 건국에 실망했다. 역성혁명이라니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고려와 다를 것인가. 권력을 가지면 그것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원했다. 이성계 장군, 이제는 장군이 아니지만 처음 그가 나를 불렀을 때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피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해라. 하지만 옳지 않은 것은 소신 있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잠시 쫓겨났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나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조금씩 높은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말 우왕 창왕 공양왕부터 조선 초 태조 정종까지 나는 그저 가늘고 길게 살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기회가 왔다. 태종 이방원 눈에 든 나는 지신사(도승지)가 되었는데 가끔 이 사람은 어떤지 저 사람은 어떤지 물어보시길래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렸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생겨 논란이 일어나게 되고 나는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었다. 나의 솔직함이 좋으셨는지 태종은 나에게 더 큰 권한을 주기 시작했다. 형조판서(법무부 장관)를 시작으로 육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게 되었고 나는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1416년, 나는 또 소신발언을 해서 태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번에는 일이 좀 더 심각했다. 세자인 양녕대군을 감싸달라 말했었는데 태종은 니가 지금 다음 왕이 될 세자편에 서기로 작정한 것이냐며 오해를 했고 나는 남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관직 생활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태종은 죽기 직전 나를 다시 불렀다.


“세종을 부탁하네, 자네가 힘이 되어주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믿고 의지할 신하는 자네밖에 없더라고 말씀 하셨다. 이때는 미처 몰랐다. 내가 정말 죽을 때까지 일하게 될 줄은.     


세종대왕은 고백하자면 너무 힘든 상사였다. 늘 넘치는 아이디어로 신하들을 불러 지칠 때까지 토론하고 또 토론하며 그 아이디어를 당장 실행할 수 있도록 닦달했다. 그때마다 나는 조율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곧 손발이 척척 들어맞기 시작했다. 세종의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읽을 수 있었다. 아이디어가 너무 막 나간다 싶을 때는 눈빛을 보내면 세종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한 팀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할 일이 참 많았다.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 성리학의 나라를 만드는 일, 이루어지지 못할 꿈같은 일들을 우리는 많이 해냈다.  

    

비리 사건에 연루되었던 적도 있지만 세종은 나 없이는 불안해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 3년 상을 치러야 했을 때도 3개월 만에 고기를 보내며 올라오라 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사직을 권하니 재택근무를 권하며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나도 세종도 우리가 벌인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나라를 안정 시켜놓고 싶었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일이 아닌가.      


나의 어떤 능력이 태종과 세종을 움직이게 했는지 돌아보았다. 나는 본질을 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현실적인 감각이 있었다. 높은 꿈을 꾸었던 세종과 나는 서로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세종은 오직 나의 능력만을 보았는데, 다른 왕들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라를 생각하는 왕, 그리고 그 왕 곁에 최고의 권력을 가진 신하가 나라를 생각하는 일이란 것은 불가능한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꿈을 꾸었고 현실로 이루어 냈다. 우리가 이루어 낸 이 꿈들이 오래오래 깨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마 쉽지는 않겠지.     

작가의 이전글 토지 20권 완독 기념 내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