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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Nov 21. 2023

조선왕 가상일기 15. 광해군

중립외교 폐모살제가 원인이었을까?

 나의 아버지는 왕이었지만 어머니는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평생을 괴롭히는 일이 될 줄은 몰랐었다. 그러나 어쩌면 언제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열심히 살게 한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엄마는 후궁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다. 그래서 우리 형이 가장 먼저 태어났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많이 슬퍼하셨고 어머니를 잊지 못해 한동안 방황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다른 여인이 그 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빈 김씨, 아버지가 총애하던 그 여인은 어머니를 잊지 못하던 아버지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기어이 어머니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아이가 생기며 형과 나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서열 문제로 더욱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지만 형은 자꾸 사고를 치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나는 그저 열심히 살았다. 일부러 모범생으로 보이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공식적인 부인 의인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세자 책봉을 망설이고 있었다. 방계출신이라는 콤플렉스가 있던 아버지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의인왕후에게 아들이 있었더라면 바로 원자 책봉을 하고 세자가 되었겠지만, 그러면 형과 나도 편하게 왕자로 지냈겠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우리가 아닌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내심 세자로 삼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에 우리는 정말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비상사태가 일어났고 나는 세자가 되었다. 형은 평판이 좋지 않았고 신성군은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원치 않았지만 내가 급하게 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의주로 몸을 피하셨다. 전쟁은 나에게 맡겨둔 채로.      


나는 갑자기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긴 하지만 혼란에 빠진 조선의 백성들을 다독이며 진정시키고 전쟁을 잘 치러내어 민심을 얻게 되었고 신하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지지층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고 그걸 뒤집을 카드는 없었다. 아버지는 실망하셨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 주었던 의인왕후가 죽고 아버지는 새로 왕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대군(적자)을 보게 된 것이었다. 새 왕비인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게 되자 나를 절대 신임하던 신하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영창대군이 성인이 되면 분명 나에게 위협이 될 것인데 나 역시 불안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는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영창대군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아버지는 무기력했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을 수습하는 건 나의 몫이었다. 우선 궁궐이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재건 사업을 시작했다. 경복궁은 워낙 훼손이 심해 건드리지 못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손보아 되돌아갈 수 있었다. 임진왜란 후 돌아갈 곳이 없어서 임시로 머무르던 월산대군 후손의 집은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임시였지만 아버지는 이곳 석어당에서 16년을 머물다 돌아가셨다.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학살, 굶주림, 전염병으로 인구가 줄고 토지는 황폐해졌으면 유교 질서는 흔들렸다. 나라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파산을 선고했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은 더 나쁜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전쟁 영웅은 대접받지 못했다. 전사하거나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 신하들을 처벌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조정안 신하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만 있었다. 전쟁의 공을 이순신과 같은 명장과 의병들의 힘으로 돌린다면 자기들에게는 그 자리에 남아있을 명분이 없어지는 것이니 의병들을 깎아내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도와주러 왔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것이라며 더욱 의리를 지키고 사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휘청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던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느라 더욱 기울어지자, 청의 태조 누르하치는 이때를 틈타 후금을 건국하고 명을 격파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명나라는 당연하게 조선에서 대규모 군대를 보내주기를 요청했고 우리는 보내야만 했다.      

다만, 우리도 살아남을 길을 마련해 놔야 할 것 같아서 강홍립 장군에게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다.      


하지만 나의 이런 중립 외교는 명나라에 사대하는 신하들에게 나를 몰아낼 명분을 제공해 주었을 뿐이었다. 혼란해진 조선을 제대로 수습하고 싶었던 나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몇 가지 약점을 잡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첫째, 무리한 궁궐 사업 (창덕궁, 창경궁까지는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경희궁(경덕궁), 인경궁(미완성), 수도를 파주 교하로 옮기는 일들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둘째, 중립 외교 (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라며 비난)     


셋째, 폐모살제 ( 새엄마인 인목왕후를 폐위시키고 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임)   

  

변명을 해보자면 능력 있는 종친들의 자리는 늘 불안하고 위험했다. 얼마나 많은 역모 사건과 관련자들의 억울한 죽음이 있었던가. (물론 불안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옥사가 많긴 했다. ) 무리한 궁궐 사업으로 나라의 경제를 파탄시키고 백성들을 원망하게 한 것, 이건 내가 생각해도 잘못하긴 했다.


하지만 내가 쫓겨난 결정적 이유는 조정의 신하들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뜻을 함께하는 대북파에게 모든 권력을 주었는데 이는 반대파들의 불만을 유발했다. 안 그래도 정적을 제거하며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이 생겼는데 그들을 견제하지 못한 내 잘못이기도 하다. 유능한 신하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균형 있게 써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정치는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을 치르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는 변명을 해본다.     


결국 나는 지금 제주도에 있다. 반정 세력이 나를 쫓아내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태안으로 다시 강화도로 그리고 이곳 제주로 오게 되었다.      


내가 한 때 조선의 왕이었던가. 이곳에서 나는 지금 귀찮은 한 노인일 뿐이다. 나를 쫓아낸 그들은 나보다 더 나은 정치를 하고 있던가. 조선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다 부질없는 생각인가. 역사는 내가 없이도 어디론가 흘러가겠지. 어느 방향인지 모르게 가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에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언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엔가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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