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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Nov 29. 2023

1. 태조 이성계는 왜 조선을 세웠을까?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태조 이성계는 왜 조선을 세웠을까?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태조 이성계죠. 물론 혼자서 한 일은 아닙니다. 성리학의 나라를 세우려는 꿈을 가진 정도전이 있었고 어려운 결정으로 망설이고 있을 때 미친 실행력을 발휘한 이방원도 있었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건 반대했지만 개혁을 원했던 정몽주와 신진 사대부들이 있었고 그들을 키워낸 공민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첫 왕이 된 사람은 바로 이성계였지요. 이성계는 어쩌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일까요?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변방의 장수에서 고려의 영웅으로     

 

  이성계가 태어난 함경도 영흥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시대를 살던 이성계에게 주어진 첫 번째 기회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주 출신이던 이성계의 고조부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동북 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원나라에 투항하여 벼슬을 받게 됩니다. 고려 출신이었지만 원나라의 덕을 보며 살게 되었던 것이죠. 시간이 흐르고 이성계 가문은 동북 면에서 알아주는 세력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영원할 것 같았던 원나라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는 이 상황을 눈치채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죠.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도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개경으로 가서 고려에 충성을 다짐하고 빼앗겼던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인정받게 됩니다. 그렇게 공민왕의 눈에 든 이성계는 고려의 장수로서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원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홍건적과 왜구들의 잦은 침입으로 고려의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의 벼슬을 받은 이성계는 뛰어난 활 솜씨로 전쟁터를 누비며 눈부신 활약을 할 수 있게 되었죠. 특히 이성계의 사병 부대인 가별초는 정예 멤버로 구성된 특수부대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습니다. 왜구들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백성들은 이성계 장군의 활약에 열광했습니다. 승전보가 전해질 때마다 인기가 높아지던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악명 높은 소년 장수 아지발도의 투구를 벗긴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며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고려를 구한 영웅이 되고 있었죠. 


 성리학자들과의 친분도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색, 떠오르는 천재 정몽주와도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변방의 장수였던 이성계였지만 이제 그 위상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결혼이었지만 개경의 유력가문이었던 신천 강씨와의 결혼도 그의 힘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정도전과의 만남     


 그러던 1383년 어느 날, 정도전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사병 부대인 가별초의 훈련 모습을 보고 “이야 장군님 대단합니다. 이 정도 규모의 군사들이라면 못 할 일이 없겠는걸요?”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죠. 아마 이야기를 듣고 펄쩍 뛰었겠지만 내심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을까? 예상해 볼 수 있죠. 정도전과의 만남은 이성계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고려 말, 원나라를 등에 업고 세력을 키운 집안들과 원래의 권문세족들은 산과 강을 경계로 하여 땅을 나눌 만큼 토지를 늘리고 있었습니다. 원나라 간섭을 받고 있었던 왕실은 그들을 견제할 힘이 없었죠. 그로 인해 왕실 소유의 땅이 부족해지며 관리들에게 줄 월급조차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은 기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대부를 등용하며 힘을 실어주려고 했지만, 그들에게 줄 땅이 없었던 거죠.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권문세족의 수탈이 심해져 살기 어렵게 된 백성들이 스스로 노비가 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한 집안의 노비는 나라에 소속이 아니라 그 집의 사병으로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국방력에도 손해가 나게 되는 것이죠. 세금이 더 줄어들게 된 건 물론이었고요.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공민왕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신돈이라는 중을 이용해 파격적인 개혁을 했지만 결국 신돈도 죽고 공민왕도 죽고 말았죠. 그리고 공민왕과 함께 고려를 개혁하려 했던 신진 사대부들도 힘을 잃고 대부분 유배를 가게 됩니다. 정도전도 이때 유배를 가게 되면서 고통받고 있는 고려의 백성들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성리학이라는 학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권력을 가지면 부패하기 쉬우니 최소한의 장치들을 가져야 한다는 정도전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정도전을 포함한 신진 사대부들과 뜻을 같이하여 개혁을 이뤄보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성계는 그들이 원하는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위화도 회군     


 그러던 중 원나라를 북쪽으로 밀어내고 성장 중인 명나라가 간섭을 해왔습니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래 원나라 땅인데 이제 자기들이 원나라 땅을 차지했으니 그 땅은 이제 우리가 관리하겠다며 통보를 해 온 것이었죠. 이때 우왕과 최영 장군은 명나라가 드디어 선을 넘었다며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요동 지역을 정벌하여 고구려와 발해 시절 우리 땅을 찾아오자고 주장했죠. 하지만 친명파였던 성리학자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장수로서 이 싸움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반대를 주장했죠. 그러나 이성계에게는 결정권이 없었습니다. 명령에 따라 출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위화도에서 상황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가족과도 같은 군사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하며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래서 이성계는 결심하게 됩니다. 마침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대비해 개경에 있던 가족들을 인질로 삼고 있었는데 다섯째 아들 방원이가 가족들을 대피시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합니다.      


 위화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최영 장군과 우왕을 유배 보내며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고려 권력의 중심이 되어 빠르게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것이 토지 개혁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모든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했지만 너무나 급진적이라 같은 개혁 세력들도 반대했습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조준의 과전법을 선택했습니다. (과전법 : 고려 말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땅을 국가가 거두어들여 소작농들에게 새롭게 나누어 주고 관리들에게 수조권(세금을 거두어들일 권리)을 준 토지 개혁법)  

    

-조선 건국     


 신진 사대부들과 함께 토지 개혁을 이뤄내었지만, 정몽주와 정도전의 갈등이 남아있었습니다. 정몽주는 모든 개혁을 고려 안에서 이루자고 주장했고 정도전은 이미 너무나 썩어있는 고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정몽주를 따르는 사람이 절대다수였고 그들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게 되고 정몽주 일파는 그 틈을 타 정도전을 탄핵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몽주는 이성계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는데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그를 죽이게 됩니다. 선죽교에서 하여가와 단심가를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후대에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도 하지요. 어쨌든 새로운 나라를 반대하던 마지막 세력인 정몽주가 죽게 되자 정도전과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는 계획대로 정도전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게 됩니다.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상이 담긴 제도를 이용해 백성이 근본이 되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도록 제도를 만들어 견제하고 튼튼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치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죠. 정도전의 급진적인 개혁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방원의 편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갈등의 정점을 이룬 것이 세자로 이성계의 첫 번째 아내의 소생들이 아닌 두 번째 부인 강씨의 둘째 이방석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이 원한 것은 재상이 중심이 되는 나라였기에 아직 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아 제왕 교육을 하고 있었죠. 그것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정도전이 군사권을 쥐고 이방원이 가지고 있던 사병까지 없애려고 하자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을 죽이게 됩니다. 그렇게 정도전이 죽고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되면서 그들이 꾸던 꿈은 멈추게 되었죠. 물론 아들이었던 이방원과 손자인 세종 대왕에 의해 이성계의 꿈은 멋지게 펼쳐집니다. 하지만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바탕을 만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절대 꿀 수 없는 꿈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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