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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Nov 29. 2023

3. 태종은 왜 백성이 안녕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까?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3.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온 나라가 복 받는다” <태종실록, 18년 6월 3일> 세종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며 태종이 남긴 말이라고 하죠. 태종은 재상이 권력을 가지는 정도전의 이념에 반대하며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태종이 꿈꾸던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지게 될까요?      



- 왕자의 난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고려 우왕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문과에 급제 해 이성계가 크게 기뻐했다고 하죠. 이후 폭넓은 독서와 실용적인 학습으로 균형 잡힌 판단과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미운털이 콕 박히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정도전과의 세력 싸움 중이던 정몽주를 살해한 사건 때문이었죠.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지 않고는 조선을 세울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조선이 건국될 수 있었지만, 정도전과 이성계는 이방원을 경계하게 되었죠.     

 

 이성계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와 개경에서 자리 잡고 결혼한 신덕왕후 강씨 두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한씨와 사이도 나쁘지 않아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포함해서 많은 자녀를 두었지만 안타깝게도 신의왕후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 돌아가셨죠. 이방원과 새엄마인 신덕왕후 강씨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이방원이 신덕왕후와 어린 두 동생을 잘 챙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강씨는 이방원에게 네가 내 친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자신의 역할을 기대했던 이방원은 실망하게 됩니다. 모든 일은 정도전에게 맡겨지고 세자 자리도 강씨의 아들 방석이가 차지합니다. 게다가 조선을 세우는데 가장 큰 공이 있는 이방원은 공신명단에 포함되지 않기도 하죠. 이에 실망하지만 바로 불만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정도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원의 사람이 되고 있었죠. 이를 눈치챈 정도전은 왕자들의 사병 문제를 거론하며 견제를 시작했습니다. 사병을 해체하고 모두 중앙군으로 훈련에 참석하도록 하는 행사에 왕자들이 나가지 않자 직접 때리지는 못하고 그들의 부하를 대신 때리는 굴욕을 주었죠. 이방원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정도전과 방석을 죽이고 형 정종을 왕위에 앉힌 후 2년 뒤 조선의 세 번째 왕이 되었죠.     


-태종의 업적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인 이성계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도전이 꾸던 개혁의 꿈을 내가 망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이 꿈꾸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원나라와 고려의 지도 자료를 모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현재 동아시아에 남아있는 세계지도 중 가장 오래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사병을 혁파했고 백성들에게 신분증인 호패를 차게 했습니다. 국가의 역할은 국방과 치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백성들의 부역 동원을 최소화하고 국경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세종대의 일이지만 대마도를 정벌했던 것도 태종의 업적입니다. 인재 선발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과거제도를 손보고 예법을 정리했습니다. ‘중앙의 성균관’‘지방의 향교’ 시스템으로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 조선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죠. 이 모든 일들은 후대에 이어져 자리를 잡을 수 있었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권문세가의 사전을 혁파하고 세금을 걷을 권리인 수조권을 조정하는 등 태종은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단, 재상이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는 정도전의 이념은 받아들일 수 없어 의정부의 기능을 줄이고 육조가 직접 보고하도록 하는 육조 직계제도로 바꾸게 되는데 왕권이 강하거나 건강한 정치가 가능할 때는 장점이 있지만 권력을 독점할 욕심을 품으면 악용되기 쉬운 제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종과 문종은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재상의 권한을 늘리기도 하죠. (황희 같은 유능한 재상이 있어서 이 또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태종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세종을 다음 왕으로 세운 일이 아닐까요? 세종 대왕을 다음 왕으로 세운 것을 포함해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능력은 능력 있는 인사들을 등용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태종 시대에도 조준, 하륜, 권근 등 인재가 있었지만 세종 시대 대표 인물인 황희, 장영실, 정인지 등을 포함 과학 인재의 70%는 태종이 선발한 인재들이었다고 하죠.      


-양녕대군 퇴출     


 태종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 총명함을 알아본 장인어른 민제의 선택으로 고려시대 내내 귀족이었던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인 원경왕후와 결혼할 수 있었죠.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도 여장부 같은 성격의 원경왕후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러나 태종은 왕이 되고 나서 달라졌습니다. 성리학의 나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외척 세력의 힘이 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자기를 왕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민씨 가문은 더욱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죠.     


 게다가 태종이 왕이 되고 후궁을 계속해서 늘려가니 원경왕후와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원경왕후와 민무구 민무질 형제들은 세자인 양녕이 왕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 양녕은 할아버지를 닮아 호방한 성격으로 공부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관심이 많아 태종의 걱정을 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종의 마음도 모른 채 민씨 형제는 굉장히 위험한 말을 하게 됩니다. “능력 있는 다른 대군들은 없는 게 낫다” 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 말을 들은 태종은 내가 형들을 제치고 왕이 되었는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냐며 민씨 형제의 발언을 문제 삼게 되죠. 어쩌면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작업이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왕비와 사이는 더욱 안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양녕을 폐위시켰습니다. 만약 양녕이 변방의 무장 집안이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이끌어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왕이 우선 모범을 보이는 군주가 되어야 했거든요. 그 때문에 많은 왕이 힘들어했지만 말이죠. 태종은 양녕을 폐위시키던 날 펑펑 울었다고 해요.      


-충녕에게 왕의 자리를 넘기다.     


 태종은 충녕대군(세종 대왕)이라면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킨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잘 이끌어갈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과제들을 해결했는데요. 세종이 스스로 하기 힘든 일, 며느리 집안을 공격했습니다. 사실 며느리도 어질고 착하고 충녕의 장인인 심온도 그리 나쁜 마음을 먹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충녕에게 정치의 잔인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요? 외척 세력이 정치에 나서지 못하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새어머니였던 신덕왕후 강씨와 아내인 원경왕후처럼 앞으로 나서진 않아도 고려에서는 외척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대마도 정벌과 같이 군사에 관련된 일들은 태종이 모두 처리하고 세종 시대를 위한 인재를 남겨둔 채 태종은 그 고단했던 생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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