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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아침의 잡설

제2막 인생의 길동무는 ‘책’

by 윈디박

비 오는 아침이다.

비 오는 풍경을 좋아한다는 핑계를 구실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는 호사를 누린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 완벽한 잠시만의 '휴식'이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중요한 일상이 된 삶이 된 것이다.


하루 10시간 이상, 업무에 몰두하지 않아도 되는 삶(반강제인 것인 함정이지만)이 예기치 못하게 나에게 주어졌다.

이런 삶을 동경해 본 적도, 이런 인생을 계획해 본 적도 없었다. 하루하루 되는대로, 그런대로 성실한 '직장인'의 삶을 대부분 살았다.


역시 그럭저럭 잔잔한 파도 위의 항해(航海)였으나 무미(無味) 한 여정(旅程)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항로(航路)를 시작한 셈인지도 모르겠다.


'제2막 여행'의 필수품이자 길동무는 '책'이다.

줄어든 급여대신 귀중한 시간을 얻은 나는 책에 탐닉했다.


지난 1년의 독서목록을 보니 꺼진 줄 알았던 책에 대한 욕망의 불씨는 '신형철'의 저서들이 지핀 듯하다.

<인생의 역사>,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와 그의 작가로서의 철학은 내게 충격이었다.

<달에 울다>,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하루키는 내 최애 소설가중의 하나라서 그동안 못 읽은 책을 빼놓을 수 없었다.

<태엽 감는 새 1,2,3 권>, <애프터 다크>, 그리고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참언론인이 거의 멸종한 이 시대가 개탄스러웠다, 특히 리영희 선생의 삶을 보니까 더욱.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그리고... <창조적 시선> 김정운,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엘리트 제국의 몰락> 미하엘 하르트만, <헤세와 융> 미구엘 세라노, 그리고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큰 기업에서의 삶이 가져다주었던 경제적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책을 펼치고 지면 위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활자들의 의미를 찾는 행위를 하니 글을 쓰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생겼다!

그 일환으로 이곳 브런치스토리의 작가가 되어 더디지만 하나씩 하나씩 나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는 내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긍정의 호들갑'이나 '불안의 뒤척임'은 확실히 덜하다.

나이가 든다는 일 중, 몇 안 되는 장점인 듯하다.


흘러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한번 살아보련다. 뭐 이제 손해 볼 일이 얼마나 있다고.


잰걸음으로 회사 주변 산책길을 걸었다. 10분 남짓한 시간, 키스 자렛의 'You've Changed'을 들으며 길게 허용될 리 없는 여유를 잠시 갖는다.

조지 마이클의 'Songs from The Last Century' 앨범에 수록된 버전이 나의 최애곡인데 우연히 발견한 라이브 버전이 마음을 흔든다.

바람의 냄새, 비의 냄새가 보인다. 여름이 멀지 않았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루를 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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