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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월급쟁이 인생역정 회고록(?)'

'아웃사이더'의 조직생활 분투기

by 윈디박


갑자기 지난 직장생활을 반추하며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소재가 고갈이 되어가는 이유도 있었지만 합산하면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살아왔던 '월급쟁이' 인생을 이제는 담담하게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의 공간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연재는 아니지만 먼지 묻은 앨범을 꺼내보듯 가끔씩 추억의 한 자락을 들춰보려 한다.





필자는 30대 중반에 운 좋게(?) 그 당시(2004년) 신형 자동차였던 뉴아반떼 XD를 몰게 되었다.

이 차가 행운을 몰고 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얼마 안돼서 나는 주변에서 인정받는 '큰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돈 안 되는 평범한 케이블 방송국 프로듀서로서의 삶은 결혼 전 선택한 인생이었지만 만삭의 아내를 보며 방향을 선회한 의사결정은 지금 돌이켜봐도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로부터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충실한 '애마'가 되어 함께 희로애락을 겪었다.

한 때 너도나도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시절이 왔어도 별다른 불만 없이 운행을 했었다.

경제적 여유가 넉넉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도무지 차를 바꾸는 일이 귀찮았던 나의 게으른 성정도 한몫했으리라.


뉴아반떼 XD의 늠름한(?) 모습



'애마' 뉴아반떼가 더 이상 'New'가 아닌 중고차 시장에서도 그 존재감이 사라져 가고 있을 즈음 내 대기업의 커리어도 서서히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즈음, 동료나 후배들은 다른 무엇보다 구닥다리 고물 국산차를 몰고 다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심지어 내가 결국 퇴사를 하게 되고 한 중소기업의 임원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을 때 후배 팀원들의 첫 질문이.. "팀장님, 법인차 나와요? 이제 차 바꾸시는 거예요?"였으니까.

실제로 법인차량은 나왔고 나는 결국 총 합 17년간의 동행을 마무리하고 내 애마 '아반떼'를 떠나보냈다.

새로운 회사 지하 주차장에서 그 녀석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는데 마치 연인을 떠나보내는 듯한 가슴 저림을 느꼈다.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뉴아반떼의 마지막 뒷모습




'아웃사이더'의 힘겨운 조직생활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 15년의 '월급쟁이' 생활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보람과 희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나날은 불안과 불면의 시간들이었다.

앞서의 '아반떼'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필자의 성향이 아주 보편타당하지는 않았기에

스스로가 자초해서 번뇌에 빠진 일들도 꽤나 있었던 듯하다.

일단 권위를 내세우는 종종 조직에서 볼 수 있는 '마초문화'가 싫었다.

물론 필자가 다닌 회사가 유독 '마초적'인 분위기였다는 것은 아니다. 호칭이나 복지 측면에서

나름대로는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지향하는 회사였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위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남성중심의 권력행사가 분명 존재했고

특히 팀장급 이상 고연차 그룹 내에서는 종종 노골적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선후배를 따지고 서열을 내세우며 라인을 만드는 조직문화에서 필자는 항상 아웃사이더였다.

나는 회사에서 항상 '정보의 섬'같은 존재였는데 남들 다 아는 가십이나 인사정보 등을 제일 늦게 알았다.

난 끌어주고 밀어주는 선후배도 없었고 당연히 승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라인'도 없었다.

하다못해 틈만 나면 우르르 몰려 나가 흡연실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무리에도 끼지 않았다.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았으니 공기 탁하고 지저분한 끽연실에 갈 일이 없었다.

어느 순간 상사들도 나를 완전히 편하게 대하지 않는 걸 느꼈다.

그들만의 이너서클에 들지 않았으니 그들과의 케미가 형성될 리 만무했다.


참 쉽지않은 월급쟁이 인생이었다



임원이 되지 못한 당연한 이유들

라인도 없고 백도 없었지만 나는 팀리더로서 조직을 8년간이나 이끌었고 꽤나 큰 성취를 이루었다.

연말의 시상에는 항상 우리 팀이 명단에 있었고 어느 해에는 대상자 모두 승진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지만 나는 직장인의 '별'이라는 '임원' 승진에 실패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자리에 앉아 있는 가장 나이 많은 팀장이란 타이틀이 '멍에'가 되어 갑작스러운 보직해임 통보를 받게 된다.

화도 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결말이 결국 라인도 없고 백이 없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난 적어도 이런 조직문화에서의 임원감은 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조직의 눈은 정확하다.

여러 가지 부족한 역량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필자의 가장 큰 결격사유는 더 높은 지위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름 없는 방송국 피디에서 대기업 홈쇼핑 영업팀장으로의 드라마틱한 변신은 역설적으로 내 업에 대한 열정을 앗아갔다.

임원이 되지 못한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선연한 목표의식을 갖지 못하는 리더에게 '임원'이라는 책임 있는 자리는 허용되지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

돌이켜보면 나야말로 조직의 혜택을 많이 본 것이다.

여러 굴곡과 시련을 거치며 나 자신을 더 탐구하게 되었고 또 다른 인생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복원력'을 갖게 되었다.


가끔은 그립다.

내 애마 '뉴아반떼'와 함께 밤낮으로 드나들던 그 공간이, 그리고 함께 울고 웃었던 그 시절의 동료들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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